하나님의 즐거움은 어디에?

날짜: 
2026/03/15
말씀: 
시16:3
말씀구절: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설교: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마다 즐거움이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일이 잘될 때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통장 잔고가 늘어날 때 행복해지고, 어떤 사람은 자녀가 잘될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만 있을까요?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있을까요? 성공한 사람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은 잘 믿는 사람에게만,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성공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즐거움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떤 다른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잘 믿는 성도’라고 하지 않으셨고, ‘헌신을 많이 하는 성도’라고 하지 않으셨으며, ‘성공한 성도’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이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 즉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은 지금도 이 땅에서 버티고 있는 성도에게 있습니다.

40년 전 제가 기도원 전도사 시절 때에 겪었던 일입니다. 당시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잠실 경기장에서 아주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모든 지교회, 지성전, 기관들이 총동원된 행사였습니다. 성도님들이 관중석에 꽉 찼고, 각 기관 대표분들이 차례대로 입장했습니다.

그냥 사람만 입장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장식을 준비해 자신들의 모습을 뽐내며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관중석에 있는 성도님들은 각 기관이 호명되고 입장할 때마다 크게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특이하고 아름답게 장식을 갖추고 입장한 기관에는 더 크게 손뼉을 쳐주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원 대표로 참석한 저희들은 입장하기 전부터 좀 풀이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특별히 꾸미거나 장식한 것도 없었고, 우리를 반겨줄 교구 식구들도 관중석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입장하는데 성도님들이 가장 열렬히 환영하며 손뼉을 쳐주시는 겁니다.

“아- 이거 뭐지? 왜 이렇게 열렬히 우리를 환영해주는 거지?” 제가 나중에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기도원에 계신 교역자들을 보며, 그 옛날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기도원에 올라가서 애타게 하나님을 찾았던 바로 그때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하나님은 실패한 성도가 교회에 입장할 때에도 과연 손뼉을 쳐주며 환영하실까요? 혹시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이 힘들어서 스스로 교회를 피할 때, 하나님도 나에게 등을 돌리시지는 않을까요? 오늘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하고 교회에 온 나를 하나님이 외면하지는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자리는 하나님과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은 땅에 있는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은 ‘하늘에 있는 성도’라고 하지 않고, 하필 ‘땅에 있는 성도’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거하는 땅은 완전한 곳이 아닙니다.

땅은 눈물과 실패가 있는 곳입니다. 땅은 죄와 씨름하고,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기뻐한단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완성된 성도보다, 땅에서 눈물로 믿음을 붙드는 성도를 자신의 모든 즐거움이라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외국 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결정적인 위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곳 캐나다 땅에서 각각 외로움과 어려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낙심도 되고, 자주자주 마음이 쳐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힘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은 바로 그런 나에게 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저 먼 우주에서 이 땅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중에 너와 나,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작은 존재입니까?

그 작은 존재가 이 땅에서 살겠다고 꿈틀꿈틀 바둥바둥 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참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그리 중요한 존재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넓고 큰 우주보다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장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하나님은 내가 실패해도 존귀하고, 내가 가난해도 존귀하고, 내가 연약해도 존귀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가치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취가 없어도 존귀하게 여깁니다. 부모는 자녀가 못났어도 존귀하게 봅니다. 부모는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잠을 자는 모습만 봐도 좋아서 웃습니다. 하나님의 즐거움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존귀하게 보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면 기분이 매우 좋아집니다.

제가 여기 캐나다에 와서 28년간 살면서 한국에 방문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방문하고,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러 갔습니다. 제가 그렇게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부모님이 저를 너무나 반기고 좋아하는 겁니다. 사실 그 당시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매달 3,000불씩 돈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 녀석이 아주 큰 빚쟁이처럼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기도 텐데…. 도리어 저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겁니다.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른 후, 저의 누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이 왔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을 하셨어.”

아니- 아들이 온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얼마나 아들이 반갑고 기뻤으면 그렇게 동네방네 자랑까지 하시는 겁니까? 당시 제가 한국에 방문할 때에 특별한 선물을 사서 간 것도 아니고, 돌아가실 때까지 만날 저에게 돈만 부쳐주셨는데…. 그리고 돌아가실 때가 가까우셔서 재산 정리를 하신다고 하기에 겸사겸사 급히 간 것인데… 그런 아들이 뭐가 그리 반갑고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심히 보고 싶어 합니다. 선물을 안 가지고 와도 됩니다. 헌금을 안 해도 됩니다. 정장을 안 입고 와도 됩니다. 성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혹시 자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 성도님의 경우 실직을 하거나, 돈을 못 벌면 그때부터 교회에 안 나오는 겁니다. 아- 저도 남자라서 이거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는 것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와서 솔직하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나를 너무나도 보고 싶은 하나님 아버지께 얼굴을 보여 드려야 그것이 자녀의 도리잖아요.

금이 가고 깨어진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는 깨져서 물을 질질 흘리며 다닙니다. 그 항아리는 늘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네가 흘린 물 덕분에 길가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완벽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어졌어도, 그 모습 그대로 귀하게 여기고,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상태로 교회 가는 게 어쩐지 위선인 것 같습니다.” 아- 괜찮대도요.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대도요.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니까요.

여러분, 아파서 병원에 갈 때, 응급실에 갈 때, 정장을 입고 가지 않습니다. 그냥 피 묻은 채로 갑니다. 교회는 정장 입고 가는 전시장이 아니라 응급실이기 때문입니다. 괜히 병원에 와서 나는 멀쩡하다고, 나는 아프지 않다고 위선을 떨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즉 인생 살기가 무겁고 힘들 때에 그 모습 그대로 교회에 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무 더러워서 목욕탕에 못 가겠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도리어 더러우니까 목욕탕에 가서 씻어야 합니다. 교회는 깨끗한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씻기 원하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16편을 다윗이 고백할 때에 성도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수했고, 흔들렸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즉 너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즐거움은 조건부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없으면 모든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나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은 힘을 잃고 밥맛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매일 봐야만 행복하고 즐거워합니다. 고로 성도는 이 땅에서 억지로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즐거움으로 부름을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육신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까? 바로 이 땅에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고, 이 땅에 사는 우리들과 함께 먹고, 함께 사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땅에서 사는 불완전한 우리들은 완전하신 예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깨끗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더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귀한 존재이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입니다. 즉 우리가 없으면 예수님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지고 맙니다. 고로 예수님은 우리가 병들었어도,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우리가 실패했어도,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제자들은 도망쳤고 부인했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들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왜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즐거움은 결코 철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성도도 여전히 예수님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도 마십시오. 오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예수님에게 큰 즐거움이 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너무도 기분이 좋습니다. 반면 여러분의 얼굴을 못 보면 저의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고로 부탁합니다. 그분의 즐거움을 위해서 당신의 그 존귀한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오늘 저 왔어요.” 하고 제발 얼굴 좀 비춰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제발 즐겁게 해주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상사병이 걸립니다. 그분은 당신의 얼굴을 못 보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아무쪼록 이 땅에 있는 존귀한 성도로서 주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행복과 즐거움의 관계를 이 외국 땅에서도 계속 이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아직 땅에 있는 우리를 향해 “너는 존귀한 자라. 너는 내 모든 즐거움이라.”고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때론 넘어져도, 초라해져도, 저희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이 낯선 외국 땅에 있어도, 우리가 주님의 모든 즐거움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 주의 도움 받고자 : 통일 찬송가 349장 / 새찬송가 2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