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외국 땅에서도 전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리 교회에 새신자 분들이 매주 오고 있습니다. 아- 너무나도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다. 새로 교회 오신 분들 중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믿은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처음 믿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목사님이 반드시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예- 바로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구약 성경은 총 66권, 1189장, 3117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총 66권, 1189장, 3117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구절을 뽑으라고 하면 누구나 요한복음 3장 16절을 뽑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 구절 속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방법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는 유치부, 초등부 때부터 이 구절에 곡을 붙이고 율동으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해보실까요? 갑자기 하라고 하면 힘드니까 일단 연습 좀 합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어릴 때부터 교회학교에 다니신 분들은 이 구절, 이 찬송, 이 율동은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익숙한 말씀도 순간적으로 아주 완전히 까먹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는 저의 어머님이 집사님일 때 평택에서 모 회사 사장 부인을 따라서 어느 집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집회에 갔다 와서 저의 어머님이 저에게 아주 심각하게 말을 합니다. “애야, 아무래도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믿은 것 같다.” “아니- 왜요?“ ”응-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 몇 년, 몇 월, 몇 시에 구원을 받은 줄도 정확히 모르고 있지 않니? 그러니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아니, 누가 그래요? 구원 받은 날짜 정확히 모르면 구원 못 받는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응- 오늘 내가 어느 집회에 갔는데 그 강사가 그러더라. 거기 가서 보니까 모두 다 은혜가 충만하고, 우리 보다 더 열심히 믿는 것 같더라.“ ”아하- 어머니 구원파 집회에 갔다 오셨구나. 거기 유명한 이단이에요. 일명 ‘구원파’라고 해요.“
“그리고 구원 받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어머니 잊으셨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보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구원 받잖아요?” “아- 그러네. 내가 왜 그걸 까먹었지.”
여러분, 보십시오. 그렇게 외우고 다 아는 성경 구절도 순간 까먹고 이단에게 미혹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 저의 큰 이모님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 당시 큰 이모님은 모 교회 권사님이었고, 그 아드님도 모 기독교 방송국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큰 이모님이 이상한 말을 자주 합니다. 또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단계 같아요. 나중에 보니까 아- 구원파에 빠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래 믿었던 권사님도 그래요. 왜 그럽니까? 아- 요한복음 3장 16절, 이걸 까먹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오늘 제가 본문으로 정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혹 오래된 신자로서 “에이- 목사님, 그거 다 아는 구절인데, 또 이야기 하시네.” 하고 무시하지 말고, 오늘 다시 한 번 겸손한 마음으로 repeat, remind 합시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라고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신’이라고 하는데 이 ‘신’에 대한 몇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첫째 '무신론‘(Atheism)입니다. 즉 신은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으로 돌아 가냐?” “하나님을 믿으려면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라.” “나는 나를 믿는다.”
둘째 ’불가지론‘(Agnosticism)이 있습니다. 즉 신이 있다 없다 말하기 참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신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해!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신중해보이고, 중립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전도하기가 힘든 부류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입장은 ‘유신론’(Theism)입니다. 즉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멘이지요? 그리고 이 유신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신론’(Deism)입니다. 다른 말로 ‘자연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18세기 계몽주의시대에 등장한 이론입니다.
이에 따르면 세계를 창조한 하나의 신을 인정하되, 그 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아주 동떨어져서 별도로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뒤에는 세상의 물리법칙을 바꾸거나, 인간에게 접촉하는 인격적인 신으로는 보지 않는 겁니다. 고로 이들은 신의 계시나, 신의 사랑이나, 신의 기적 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범신론’(Pantheism)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만유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즉 땅의 나무도 신이요, 돌도 신이요, 사람도 신이요, 동물도 신이요, 하늘의 별도 신이요, 달도 신이요, 해도 신이요, 누구나 모두가 다 신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셋째 ‘다신론’(Polytheism)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많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입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가 있습니다. 힌두교에는 신이 3억-4억 개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힌두교에는 일인당 신이 하나씩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토’도 다신론 사상인데 이 신토에는 많게는 800만개의 신, 적게는 3만개의 신의 있다고 합니다. 일제압제기 때 일본 사람들이 이 신토 숭배를 강요하므로 한국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를 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넷째, ‘일신론‘(Monotheism)입니다. 유일한 신이 있다고 믿는 이론이기에 ’유일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신약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하나님, 즉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후 600년경에 생긴 이슬람교도 ‘알라’라고 하는 유일신을 믿습니다. ‘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신’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이슬람 성경인 ‘꾸란’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 ‘하나님’이라고 번역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 번역본에는 모두 ‘알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알라’라는 의미를 모르는 분이 한국어 꾸란을 보면 하나님이란 단어 때문에 기독교의 하나님과 혼동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먼저 퀴즈를 하나 낼 테니 한 번 맞춰 보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몇 분일까요?” 정답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유일신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세 분이 모여서 하나의 신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하나님이 ‘세상을’ 하고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지칭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와 인류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은 악을 사랑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나온 배경을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유대인이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요, 유대인들만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구절은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이 한 마디 말씀은 니고데모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개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개 같은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서 특별히 제한된 몇몇 사람, 몇몇 민족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굴이 까만 사람도 사랑하셨고, 하얀 사람, 노란 사람도 다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피부색이 섞인 혼혈인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과 족속과 방언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너도 사랑하시고, 그도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불의한 마귀의 자녀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고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였느냐고요? 그 사랑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다른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 구절을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이토록, 극진히, 무척, 너무나’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는 ‘엄청나게, 무지무지하게’ 애들 표현으로는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여러분! 태어나서 이제까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사랑이 가장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대부분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분은 아내와 남편의 끈끈한 사랑, 그리고 애인과의 사랑도 감미롭고 달콤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내 가족,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한정됩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하나님의 사랑만큼 크지도 높지도 깊지도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의 지식을 통하여 이성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니 원수를 위하여 내 생명, 아니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기까지 내놓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랑에 대하여 잘 실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이성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일단 감정으로 느껴야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더울 때 시원한 바람이 불면 우리는 느낍니다. “아- 시원하다!” 그리고 추울 때 따뜻한 햇살이 비추면 우리는 느낍니다. “아- 따듯하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을 감정으로 믿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감정이 늘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 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귀한 사랑까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대단한 비극입니다. 세상 말로 불 꺼진 항구요, 불 꺼진 화로입니다. 냉랭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느껴야 합니다. 날마다 그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고 말씀합니다.(엡3:1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계3:4-5) 그 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고 있다고 합니다.(고후5:14)
하나님은 죄를 짓고 완전히 타락하여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인간들을 위하여 한 가지 법칙을 베푸셨습니다. 다름 아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내 죄가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떤 착한 행실을 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착한 행실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절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착해질 힘과 능력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헌금을 많이 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기독교는 부자들의 종교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시는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믿는다는 조건입니다. 이것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학벌이 좋지 않아도 되고요, 인격이 그리 잘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조건은 강도도, 창녀도, 도둑도 “주여- 내가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쉬운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구원 받는 방법이 너무나 쉬워서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은 실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태양 빛을 보십시오. 모든 동식물에게 너무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값없이 주셨지, 어떤 대가를 받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기 즉 산소도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값없이 주셨지 돈을 받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것을 영어로 ‘priceless’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priceless입니다. 선물입니다. 선물은 돈을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는 것이고 그냥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만으로 너희에게 영생을 선물로 줄 테니 그냥 가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들에게 그 사랑의 감격이 없습니까? 왜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누리는 그 벅찬 행복을 왜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도대체 왜 그럽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활력이 없어지고, 믿음도 떨어지고, 의심만 잔뜩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므로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봉사할 충성심도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시험에 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직접 느끼고 회복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내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아직 느끼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오늘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