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하는 자는 행복하다

날짜: 
2012/04/01
설교: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행복하다.
지난 달 Family Day 연휴 때였습니다. 여기 캘거리에 있는 목사님들 가족들이 밴프에 있는 한인 교회에 모여서 같이 식사도 하고, 운동(배드민턴)도 하고, 회의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우리교회의 아무개 성도님에 대하여 모든 목사님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순복음 교회 아무개 성도님, 참 괜찮아요. 그 분 참 착해요. 그런 성도님은 100명이 있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말의 의미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성도 100명이 있어도 괜찮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교회에 성도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즉 이 말의 의미는 성도가 많아도 때때로 목사를 힘들게 하고, 교회를 힘들게 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가 힘들어지고, 목사가 힘이 들 수가 있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목사님, 이민목회 하는 중에 얼마나 성도님들이 속을 썩이고 성도님들에게 고통을 당했으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표현이 나올까?“ 제가 그 목사님의 말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응, 우리 교회는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어!”
그러자 옆에 또 다른 목사님이 저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교회는 착한 사람들만 남아서 그렇지!”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또 생각했습니다. “저 목사님도 속 썩이는 성도님으로 인해 지금 힘들어 하고 있구나!”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우리 교회의 아무개 아무개 성도님들을 칭찬하면서 그런 성도님들이 있어서 제가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며, 옆에 계신 목사님들도 저를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착하고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기분이 상당히 좋습니다. 마치 내 자녀를 칭찬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고 저에게 이것저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아마 그런 약속을 미리 받으면 누구나 다 목회자가 되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난 25년 동안의 목회를 뒤돌아봅니다. 하나님이 25년 동안 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고, 좋은 성도님들도 보내어 주셨고, 25년 동안 주의 종으로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주일을 빼먹지 않도록 건강도 주셨습니다. 또한 좋은 아내도 주셨고, 믿음의 딸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캘거리라고 하는 좋은 목회지도 주셨고, 많은 평안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을 돌립시다.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 만 명, 십만 명 성도님들을 모시고 목회하는 목사님이 부럽지 않습니다. 솔직히 세계 최대의 교회에서 저보고 담임 목사로 오라고 해도(그런 일 없겠지만)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저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입니다. 믿음대로, 고백대로 될지어다. 아멘!
제가 어찌 이런 축복을 받았는지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시다. 박수를 힘차게 안치시는 분은 뭡니까? 제가 행복한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하여 뭐 불만이 있습니까? 아니면 제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힘드시죠?" 제가 대답합니다. "이 정도면 대단히 행복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저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옆에 분들께 이렇게 인사합시다. "우리 목사님을 더욱 행복하게 해드립시다." 여러분,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이 그를 저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고 여러분은 저를 행복하게 하면서 같이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렇게 행복한데 여러분들은 요즘 어떠한가요? 행복한가요? 불행한가요? 갑자기 이 말을 들으니 힘이 빠지는 분이 있습니까?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이 중에 "나는 불행하다." 또는 "지금 나만큼 불행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도대체 왜 불행합니까?
혹시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어디에서 불행한 겁니까? 가정입니까? 학교입니까? 일터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장소입니까? 아무리 그곳에서 불행을 느껴도 하나님 아버지 집이요,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서만큼은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 사람 때문에 불행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 문제로 인해 불행을 느껴도 지금 이 시간은 그 문제가 전화위복이 된다는 확신을 얻어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 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혹시 저 때문에 지금 불행하지는 않은가요? 제가 여러분께 상처를 주어서 마음이 아프지는 않은가요?
저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그저 먼 산 보듯이 보지 말고 저의 눈을 뚫어지라고 바라보십시오. 혹시 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살며시 내려 깔거나, 혹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시는 분은 적어도 저로 인해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여간 어쨌든 간에 저로 인해 요즘 불행을 느꼈다면 일단 죄송합니다. 다 저의 불찰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얼마 전에도 저로 인해 불행한 사건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한 어린이와 제가 얼마 전에 같이 이야기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심코 그 어린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에이, 고추 떼어버려야겠네!” 그런데 이 아이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조금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어댑니다.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 이 아이가 왜 그렇게 난리를 치며 울어대는지 알아보니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 아이는 “고추 떼어버려야겠네!”라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보는 겁니다. 날카로운 칼이 자기 고추를 싹둑- 자르므로 자기 고추에서 피가 철철 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픕니까?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렇게 상상을 하니 목사가 자기 고추를 자르려는 아주 끔찍하게 잔인한 악인으로 비춰지는 겁니다. 그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기 고추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고추를 자르려고 하는 악인에게 공격 태세를 취합니다. 아마 한 동안 그 아이는 저를 슬슬 피해 다닐 겁니다. 아마 한 동안 그 아이는 도끼눈을 가지고 저를 쳐다볼 겁니다. "이 나쁜 놈! 내 고추를 자르려는 못된 놈!" 하고 인상도 팍- 쓰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단 1%도 없었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는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남자의 거시기가 잘려지는 큰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대단히 기분이 상했습니다.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인생의 쓴 맛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담임목사에게 말입니다.
저는 이 아이가 이 일로 인해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조금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교회에 잘 나올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부모가 그 불행의 사건을 아이에게 잘 납득시키고 그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부모가 중간에서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잘해주기 때문에 그 아이는 계속 인격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고,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부모가 이 사건을 정반대로 해결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니 목사님! 왜 어린이에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해서 애를 저렇게 울리는 겁니까? 정말 이 교회 나올 마음 딱 떨어지네요! 빨리 우리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세요. 안 그러면 나도 이 교회 다시는 안 다닐 겁니다. 목사가 되어서 애들까지 이렇게 시험에 빠트려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자기 자녀가 교회에서 울면 부모의 마음이 좋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면 이건 바른 부모의 모습이 아닐 겁니다. 아마 아이의 교육이나 인격이나 신앙이 더 망칠 겁니다. 혹시 교회에 다니면서 누가 누구 때문에 불행한 일이 발생할 때 옆에 있는 중보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착한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하므로 우리 모두를 행복한 길로 이끄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성경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즉 화평을 그냥 피동적으로 따라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러분, 누가 행복한 사람이 될까요? 화평을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고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화평을 위해 힘쓰지 않고, 화평을 깨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단체나 모임에 가면 화평을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트러블메이커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화평을 만들기보다는 트러블을 만드는데 더욱 익숙하고 빠릅니다. 그런 것에 더욱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화평을 만들어내는데 적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아름다운 피스메이커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모임의 분위기가 유지되고 좋아집니다. 그런 분들로 인해 가정과 교회도 유지되고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좋은 분위기 때문에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즉 화평을 심는 사람은 화평의 열매를 먹으며 내일이 더욱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2-13) 즉 어느 집, 어느 모임, 어느 부서,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평안과 화평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도 평안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37:37)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아무쪼록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배움의 터전에서도, 교회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화평을 도모하므로 그 평안을 맛보고 더욱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7에 이런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러분, 화평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하나님의 유업을 잇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아버지가 사업을 해서 재산을 많이 모았습니다. 재벌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그 사업과 재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주와 만물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누구에게요?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가 아버지의 모든 유업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예비된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화평케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모든 예비된 것을 받아 누리시고, 더욱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