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본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으시다면, 그때 얼마나 피눈물이 나고 억울했겠습니까?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고, 내가 피땀 흘려 모은 물질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렸을 때의 그 분노와 배신감은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을 것입니다.
제가 왜 오늘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최근에 제가 누구로부터 직접 사기를 당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옛날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어머님에게 모든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그 유산 중에 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었는데 아직 안 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큰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버님에게 큰돈을 빌린 분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즉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결국, 그 큰돈을 몽땅 띠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의 어머님이 말했습니다. “괜히 남에게 돈을 꾸어줘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말았네. 쯧쯧쯧.” 그런데 그 후 2년 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라- 그 유산에 보니까 어머님도 남들에게 돈을 꾸어주었습니다. 아버님만큼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액수입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돈을 빌린 사람들이 모두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지금 와서 제가 왜 이게 생각이 나냐 하면 요즘 제가 돈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아- 지금 그 돈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혹 누군가에게 사기를 쳐본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들으면 우리는 손사래를 칠지 모릅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남의 돈을 수억씩 등쳐먹는 사기꾼도 아니고, 나는 평생 법 없이도 살 정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사기’의 기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 일상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남에게 돈을 빌릴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온갖 사정을 다 해놓고서, 막상 돈을 갚아야 할 때가 되니까,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게 아까워서, 돈 꿔 준 사람의 전화를 피하며 안 갚으려고 하면 그것도 일종의 사기 아닙니까? 맞지요?
제가 여기 캘거리에서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돈을 빌릴 때는 괜찮은데, 막상 빌린 돈을 갚을 때는 솔직히 너무나 힘들어요. 그 돈 갚으려고 하니까 솔직히 너무나 아까워요.” 그러면서 그분이 아주 호탕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스스로 굉장히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이 사람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입니까? 제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와- 이거 뭐야? 이거 도둑놈 아니야? 완전 사기꾼 심보네.” 근데 그렇게 말한 분이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나 장로님도 아니고 목사님이었습니다. 아- 이거 목사님인 제가 다른 목사님에 대해 안 좋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암튼 현실은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님들이 이런 일들을 당할 때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또 이런 일들로 인해 낙심하거나 주님을 떠나지 말라는 의도에서 말한 겁니다. 하여간 제가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그분하고는 돈 관계 일절 안 합니다. 또 자연히 그분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사기꾼 목사가 되기 싫습니다. 정직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특히 돈에 대해 더욱 그렇습니다. 제 신조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는다.”입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있었을 때, 성도님들이 ‘교통비’를 포함해 이런저런 돈 봉투를 주는데 그거 일절 안 받았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가 생활하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걸 성도님들도 알고 있기에 다들 그렇게 돈 봉투를 챙겨줍니다. 그런데 그거 받다가 종종 말썽이 생겨서 명예가 실추되고, 목회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이겁니다. “아- 돈 몇 푼 때문에 이 귀한 하나님의 사역이 훼방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아예 받지 말자.”
그리고 전도사님이 목사님이 되는 목사 안수식 때에 보면 성도님들이 찾아와서 축하도 해주고 축의금도 주는 것이 교회의 관례이지만, 저는 그때에도 아예 앞에다 책상조차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교회 기도실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저를 축하해주러 오신 많은 교구 식구분들이 그때 저를 한참 동안 찾아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좀 별났지요?)
그리고 제가 결혼식 때에는 축의금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저는 그것도 안 받고 싶었는데, 제 부모님을 보고 저의 결혼식에 오신 손님들이 많이 있다 보니 할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의금을 받았는데, 그 후 제가 여기 캐나다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분들에게 받은 축의금을 갚아줘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빚을 지고 갚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 겁니다. 이건 제가 원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 지지 말라.”(롬13:8)고 했는데, 그분들에게 빚을 갚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저에겐 항상 이런 마음이 있기에 저의 딸 결혼식에도 성도님들에게 청첩장을 돌리지 않고 아주 간단히 하게 되었습니다. 제 딸도 그것을 원했고요. 그리고 한국에서 갚지 못한 축의금을 여기 캐나다에서 다른 분들에게 형편이 닿는 대로 조금씩 갚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내가 축의금을 주었으니 나도 언제가 꼭 받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종종 축의금으로 인해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결혼식 때 청첩장 돌려 사람들의 호의와 축의금을 잔뜩 받아놓고는, 나중에 그 사람들의 경조사에는 인색함이 발동해 모른 척 지나쳐 버렸다면, 그것 역시 상대방의 마음을 안 좋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내 이익을 챙길 때와 내 의무를 다해야 할 때가 다른 겁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나는 상대방에게 축의금을 주었는데 상대방은 무슨 이유인지 나에게 축의금을 안 줄 때, 알게 모르게 상대방에게 섭섭해서 시험이 들고, 그로 인해 서로 간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치사하고 마음이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 아픈 사실은, 세상의 이 치사하고 오염된 계산기를 우리가 교회 안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신앙 안으로 그대로 들고 올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만큼 예배드리고, 이만큼 교회에 헌금하고 헌신했으니 하나님도 나한테 이만큼 계산해서 복을 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라며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하면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누가 나를 안 알아주나 서운해하며 사람의 반응에 따라 자꾸 계산기를 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을 보면서 하는 충성은 결국 주님이 싫어하시는 세상의 위선으로 끝나고 맙니다.
제가 한국에서 총각전도사로 있을 때, 같은 대교구에 있는 목사님들과 나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들의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하러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하러 안 간다.” 저는 당시 이 말의 뜻을 몰라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자 그분들이 웃으면서 설명해줍니다. 옛날 한국 사회에 지위가 높은 정승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는 그 집 마당에 똥을 싸는 개가 죽어도 어떻게든 줄을 서고 눈도장을 찍으려고 부조금을 들고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막상 정승이 죽으면, 이제 더는 얻어먹을 것도 없고 이용 가치도 없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등을 돌리고 발길을 끊어버린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계산으로 인생을 사는데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인간적인 계산을 했다면 그 높은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겁니다. 혹 이 땅에 와도 호화로운 궁궐에 왕으로 오시지, 비천한 땅인 나사렛 촌 동네로 오시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즉 예수님의 계산법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히려 손해를 당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 말은 내가 사람들에게 100원을 주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100원이나 혹은 이자를 부쳐 200원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남에게 100원을 주었는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10원밖에 안 주고, 때로는 10원도 안 주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괜히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중심을 아시고 다 챙겨준다는 겁니다. 넘치도록 챙겨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주는 일에만 열심을 내고 받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아멘이지요? 즉 세상의 쩨쩨한 손익계산서를 따지면서 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베푸는데 열심을 내며 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삶이요, 고귀한 십자가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섬뜩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어찌 보면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인생을 참 바보처럼 사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주시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계산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국 세상에게 시험이 들고, 세상에게 배신을 당하고 말지만, 예수님처럼 천국 계산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는 겁니다.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천국 계산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것을 성경의 언어로 ‘믿음’이라고도 하고, ‘희망’이라고도 하며, 혹은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계산법은 믿음 대신 의심을 심어주고, 희망 대신 절망에 빠트리고, 사랑 대신 미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반대로 천국 계산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코 그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계산법은 글자 그대로 천국에서까지 계산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의 계산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평안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천국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한 분밖에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받았고, 천국과 영생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고로 이 땅에서 내가 사람에게 뭘 조금 덜 받았다고, 내 계산대로 되지 않았다고, 기분 나빠하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천국 계산법으로 좀 더 느긋하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세상 계산기를 두드리고 살면 늘 기분이 상하는데, 우리에게는 천국 계산기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로 이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이제는 좀 더 너그럽게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천국 계산법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