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바로알기3)캐나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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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의 정착
16세기 초에 캐나다로 찾아온 초기의 유럽탐험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인 J.카르티에입니다. 프랑스인들은 모피를 얻기 위하여 인디언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으며, 17세기초 프랑스 인 S.샹프랭은 1608년 퀘벡에 성채를 쌓아 그곳을 뉴프랑스식민지의 거점으로 삼아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를 열어나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충돌
1583년 뉴펀들랜드에 영국의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1605년에는 프랑스 셰프런 식민지가 건설 되었습니다. 영국은 다시 허드슨 베이라는 상사를 1670년에 세움으로써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뉴프랑스 남쪽에 있던 영국 식민지가 확대됨에 따라 양국간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유럽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이 촉발되어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해상과 육상에서 여러 차례 충돌하게되었으며 그 결과 1713년 노바스코샤와 허드슨만 주변이 영국영토로 되었고, 뉴펀들랜드도 이때 정식으로 영국령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유럽의 7년전쟁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프렌치·인디언전쟁은 프랑스의 완전패배로 1759년에는 퀘벡,1760년에는 몬트리올이 함락됨으로써 결국 160여년간의 프랑스통치시대는 끝났습니다.

영국식민지시대
1763년의 강화로 영국은 과거의 뉴프랑스였던 퀘벡식민지를 차지하였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 식민지로는 남쪽의 13개 식민지 이외에 이미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가 있었으며, 그 나머지 지역은 허드슨만회사가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영향이 캐나다로 밀려와 캐나다내 프랑스인들의 독립운동으로 전개되는것을 두려워하여 프랑스인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퀘벡법을 지정하여 프랑스인들의 문화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민법을 적용, 가톨릭신앙의 자유, 장원제도의 보존 등 퀘벡인에게는 프랑스인으로서의 기득권이 보장되었습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이후 왕당파로 불리는 4만명정도의 영국 사람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어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갈등을 일으켜 세이트로렌스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Upper Canada, 남쪽에는 Lower Canada로 양분되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영국인들은 영국에 귀속받기를 거부하고 자치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캐나다에서 일어난 민주화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영국에서는 더럼 총독을 파견하여 1839년 더럼보고서에 의해 식민지의 자치권부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한 흡수를 주장하여 1841년 연방캐나다 식민지가 설립되고 1848년 책임정부가 형성됨으로써 식민지 시대가 이루어졌습니다.

캐나다의 건국 및 발전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는 1854년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맺었으나, 남북전쟁 후의 금광산업을 노린 미국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또한 정치적 침체극복과 더 폭넓은 시장확대를 위하여 연방화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퀘벡에서의 회의로 67년 7월 1일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온타리오·퀘벡의 4개 주로 구성되는 캐나다자치령이 탄생되었습니다. 이후 캐나다는 보호관세를 채용하고 대륙횡단 철도를 부설하여 캐나다 경제 산업 발전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각 주와 중앙정부간의 이해견해의 차이를 좁히고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계속적인 이민자 흡수와 자기경제 개발로 성장한 캐나다는 1차,2차 대전에 참전했을뿐만 아니라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을 개최했으며 1992년에는 미국과의 관세협약인 북미자유협정을 맺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1월 14일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으며 북한과도 2001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