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 삶

날짜: 
2009/06/07
설교: 

히10:38 차원이 다른 삶
인간은 자기가 속한 차원에 따라 생각을 합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은 농촌 생활의 차원을 따라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도시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외국에 나와서 사는 사람은 외국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시골 처녀가 도시 총각에게 시집을 오면 차원을 바꿔야 됩니다. 아침에 우물터에 물을 길러 가지 않습니다. 빨래하러 냇가로 나가지도 않습니다. 꼭지만 틀면 수돗물이 나오고, 전원만 꽂으면 세탁기가 빨래를 해줍니다. 사람은 자기가 속한 세계에 따라서 생각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의 차원을 바꾸지 못하여 큰 시련을 겪은 것을 살펴봄으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두 차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두 차원의 하나는 애급에서 살 때의 종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원은 그들이 해방을 얻어 자유인이 된 차원입니다. 그들은 430년 동안 애급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종의 위치에서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종이기에 주인보다 열등하다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종이기에 늘 절망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을 받았을 때에는 종의 생각의 차원은 달라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애급을 나왔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차원을 따라 믿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이성이나 감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하지 말고 믿음과 하나님의 기적의 차원을 따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원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애급을 막 탈출하여 홍해에 이르렀습니다. 건널 다리도 없고 배도 없습니다. 그런데 애급의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차원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야, 애급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홍해 가에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고 이끌고 나왔느냐?"
그러나 모세의 대답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차원에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러 내셨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애급 군대를 멸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똑같은 사건을 두고 보는 차원이 다릅니다. 종의 차원을 가진 사람은 인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도리어 큰 기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고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더욱 확실해지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2.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 차원의 생각으로 바뀌게 된 계기
홍해수 앞에서 모세는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하나님이 큰 동풍을 밤새도록 불게 하여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고, 결국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홍해가 갈라져서 하루 만에 마른땅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펌프로 물을 퍼내도 하루 만에 홍해바닷물을 다 퍼낼 수 없습니다. 터널을 파도 하루 만에 터널을 팔 수 없습니다. 고로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 차원에서 믿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따라가면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의 생각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같이 할 때의 생각과 차원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가오고, 직장도 잃어버리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외국이기에 더욱 그 절망감은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그런 와중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즉 똑같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 그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300여 명을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는 고아가 많았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대왕,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사르트르,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 공자 등이 다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크게 쓰임 받았던 모세와 사무엘도 친부모 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고아였습니다.
그런데 피에르 박사는 이런 고아들이 세계를 주도했다고 말하면서, 이는 역경이 인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역경을 돌파해 가면서 누구도 얻지 못하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경이 다가오지 아니하면 언제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인간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경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생각하니 새로운 인생의 돌파구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이 떨어졌습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습니다.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합니까?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또 원망해야 합니다. 또 불평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만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쓴물이 있으면 달게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연못 옆에 있는 한 나뭇가지를 하나님이 지시했습니다. "모세야, 이 나무를 물에 던지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보니 신기하게도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이 차원이 아닌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하고 기적을 기대하고 기도한 모세를 위해서는 하나님은 이미 쓴물을
달게 만들어 놓을 방법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광야를 한 일주일쯤 지나니까 애급에서 가지고 온 모든 음식이 다 고갈되었습니다. 보따리에다 밀반죽을 해서 걸머지고 왔는데 다 먹어버렸습니다. 한두 명도 아닌 3백만 명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이곳은 농사지을 장소도 없고, 거둘 음식도 없고, 잡아먹을 짐승도 없고,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과일도 없다. 고로 절망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방법이 안통할 때에는 계속 원망하고 불평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3백만 민족을 애급에서 이 광야로 이끌어 내실 때는 다 계획이 있다. 이렇게 먹을 것이 없어도 굶어죽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주여,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는 모세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즉 다음 날 아침부터 40년간 양식 걱정 없이 살도록 만나가 내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으로 나가면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감각적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원망 불평 탄식을 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미국의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말씀했습니다. "절벽 가까이 오라." 목사님이 절벽 가까이 가니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더 가까이 오라." 목사님이 더욱 가까이 절벽으로 나아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기 일보직전으로 흔들흔들 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확 절벽으로 밀어 버렸습니다. 목사님은 "악!" 하고 절벽으로 고꾸라져 떨어지면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발버둥을 치니까 자기가 날개가 달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떨어지다 말고 날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벽에서 안 떨어졌으면 여태까지 날개가 있는 것을 몰랐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니까 날개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믿음의 날개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절벽과 같은 문제만 만나면 그 절벽 앞에서 한숨만 짓고, 불가능만 외치며 돌아갔었는데 고난을 극복하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믿음의 날개가 있는 것을 깨달으니 절벽이 오면 더욱 빨리 전진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맞이할 때 인간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전진의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종종 인간적인 차원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믿음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믿음의 차원으로 한 단계 높여서 인생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고로 성경의 위인들은 이러한 인생의 비결을 배우신 분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성경도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3. 차원 높은 인생을 살자.
혹시 이곳 외국 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차원 높은 모습으로 인생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문제만 만나면 절망과 탄식과 불평과 원망으로 사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고백을 하며 소망으로 사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종의 차원에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차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뭔가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합니까? 세상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절망적인 차원에서 소망적인 차원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는 잘 안되니까 성경을 읽고, 생각과 사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영의 세계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의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의 차원에 들어가야 합니다. 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이 가르쳐준 영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인간은 교육을 많이 받았든 아니 받았든 간에 인간의 차원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차원으로는 홍해수를 건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차원으로는 당장 물이 없으면 목이 말라 죽고 맙니다. 인간의 차원으로는 양식이 없어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으로 홍해수를 건널 수 있습니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40년간 먹고 살 수 있는 만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차원으로 살면 도저히 살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피할 길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당장 인간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고 인간의 귀에는 아무 것도 안들려도 영의 눈으로 보고 영의 눈으로 들으면 보이고 들립니다. 그래서 외칠 수 있습니다. "살 길이 있다. 이제 곧 나타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인간적인 차원이 아닌 믿음의 차원에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