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의 싸움

날짜: 
2010/05/31
설교: 

잠16:32 자기와의 싸움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한국 전방의 한 군인으로부터 이상한 편지가 왔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원효씨,(마치 여자 애인에게 쓰는 편지처럼) 저는 고독합니다. 쓸쓸합니다. 외롭습니다. 저를 위해서 꼭 답장을 해주시시기 바랍니다. 만약 원효씨가 답장을 안 해주시면 저는 죽을는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긴 장문의 편지였습니다. 그 군인은 제 이름이 여자 이름으로 생각이 되었든지 마치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쓰듯이 자신의 감정을 담아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속으로 "허 참! 이상한 녀석 다 보겠네! 그런데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을까?"하고 궁금해 하면서 겉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았습니다. 그 군대 주소는 저의 친한 친구가 군인으로 있는 곳과 같은 부대였습니다. 친한 대학교 친구 녀석이 군대에 먼저 갔었는데 자주자주 저보고 면회 오라고 편지를 쓰곤 했었습니다. 제가 그때 답장편지를 썼었는데 아마 제 친구와 같은 부대에 있는 군인이 저의 그 답장편지를 보고 주소를 알은 것 같습니다.
제 친구가 하도 저에게 편지를 자주 쓰니까 아마 그 부대에 있던 군인이 저의 이름이 여자 이름 같으니까 아마 애인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남의 애인에게 편지를 씁니까? 하여간 이상한 녀석입니다. 제가 그 편지를 받고 얼마 후에 제 군인 친구를 면회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희 부대에 아무개라는 병사가 있냐?"
그러자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묻습니다. "야, 네가 어떻게 그 아이 이름을 아냐?" "응, 나도 모르는 군인인데 게가 나한테 굉장히 외롭다고 장문의 편지를 썼더라. 나보고 어떻게 하자는 거야? 아무튼 게 잘 있냐?" 그러자 친구가 대답합니다. "갸 죽었다." "아니, 왜? 얼마 전에 나한테 편지까지 섰던데?" "글쎄, 그 녀석 전방에서 군대 생활하느라고 외로웠던지 M16 소총으로 자살해 죽었다." 즉 군인이 전쟁을 치르다가 적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삼손이란 유명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희한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블레셋 군인 일천 명을 물리친 장사였습니다.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던 괴력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로 인하여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그 후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고 들릴라라는 기생과 더불어 방탕한 생활 속에 자신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는 적들에게는 강했지만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므로 결국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눈이 뽑히고 조롱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미 소년 시절에 거인 골리앗을 무찌른 용사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서 적과 싸우고 있을 때 자신은 궁궐 옥상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달밤의 빛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습니다. 이때 다윗이 은혜가 충만했더라면 "예수의 피!" 하면서 그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장면을 계속 뚫어지라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벌거벗은 여자를 쳐다보니 순간 욕정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하를 시켜 그 여인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결국 순간의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남의 부인과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자기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그 남편 우리아를 적의 화살에 맞아 죽도록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임신을 하자 그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죄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겠지!"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았습니다. 간음을 저질러서 낳은 아이가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집안에 배 다른 자녀들끼리 간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는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아비인 자신을 죽이겠다고 반역을 하고 덤비므로 다윗은 노년에 엉엉 울면서 맨발로 도망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군인이요, 그렇게 하나님께 칭찬 받던 다윗이 순간의 자기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이런 수욕과 환난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면 너무나도 훌륭한 운동선수, 훌륭한 정치가, 훌륭한 그 사람들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하므로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남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요, 진정한 영웅이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보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은 외적인 로마의 박해를 꿋꿋하게 잘 견디고 계속 복음을 전파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그들은 내부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내면의 적인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패하므로 결국 기독교는 중세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시험을 당하는 가장 큰 요인도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닙니까? 남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환경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일단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외부의 적은 결코 우리를 시험에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고로 시험에 든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남을 탓하지 말고 먼저 자기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솝 우화 중에 파리와 좀나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먹다가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먹으면 될 텐데 조금 더 조금 더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파리는 날개가 꿀에 젖어서 도저히 날 수가 없게 되고, 그냥 거기서 꿀 좀 먹다가 죽어 버리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신세가 됐을 때에 좀나비가 펄펄 날면서 파리를 비웃었습니다. "야- 파리야, 아니 조그만 놈이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걸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냐? 이 미련한 놈아!" 그러다가 해가 졌습니다. 한 농부가 밤이 되어 등불을 켰더니 좀나비들이 모여드는데 불 가까이로 막 모여들다가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나비가 모여들다가 그만 그 속에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파리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야- 이 미련한 좀나비야, 너는 나 보다 훨씬 더 바보다."
즉 자기 욕심,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끌려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파리와 좀나비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의 타락한 마음, 자기 자신의 잘못된 인격, 자기 자신의 좋지 못한 습관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도 결국 파리와 좀나비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한다."(고전9:27)고 말을 합니다. 즉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냥 내 멋대로 내버려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예를 길들이듯이 나를 쳐서 복종케 해야만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자기를 쳐서 복종케하지 않으면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자기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합니다. 즉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질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병이 있기에 자신은 겸손할 수 있고, 이것이 아니면 자신은 교만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즉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나를 계속 찔러야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도저히 설 수가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기 훈련이요, 자기 연단입니다. 신앙 세계에서 싸우는 것은 그 어떤 다른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마귀와의 싸움보다 더 치열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늘 패배를 맛보면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만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즉 자기를 이기는 자는 무엇이라도 다 이길 수 있으나, 반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의 성경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즉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요,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외부로부터의 도전보다는 내 안에서부터 오는 도전이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지를 괴롭히고, 나를 죄악으로 이끄는 세력은 외부에서 보다 내 안에서부터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고로 자기의 죄악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내, 훌륭한 학생, 훌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결국 가정이 파탄되고, 미래가 암흑 속에 빠지게 됩니다. 고로 최후의 성공자요 최후의 행복한 자는 바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쪼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므로 가정과 교회가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자기 자신이 아무리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결코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즉 내가 아무리 결심하고 나를 이기려고 해도 내 안에는 나를 이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이기어주어야 합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도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고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주님, 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고, 또한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시자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고로 이 외국 땅에서도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므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를 맛보며 그에 따른 천국의 평안과 기쁨, 축복과 행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