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와의 싸움

날짜: 
2004/02/02
설교: 

제 목 : 자기와의 싸움
본 문 ; 잠언 16:32

인터넷 서치 엔진에서 '자기와의 싸움'이란 말을 입력하여 엔터를 치니까 이런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군대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고로 부모님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여- 내 자녀가 적과 싸워 이기기 전에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
"캘리포니아에 사는 프로 골퍼 박한평 씨는 '골프는 엄격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라고 말합니다.
"흔히들 마라톤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는 소감을 묻는 말에 금메달을 딸 때까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태권도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가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자신과의 끊임없는 처절한 싸움과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태권도의 본질적 가치로 생각한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누가 더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공부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유학 생활의 성공 비결은 자기와의 싸움에 달려있다."

"주식투자를 오래 해본 프로들은 주식투자는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며, 자기를 이길 수 있는 냉철한 사람만이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식투자를 오래하다 보면 주식투자에 대한 실패의 원인이 지나친 자신의 욕심이나 미련, 후회, 공포심, 성급함, 조바심 등 인간적인 감정이나 약점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열량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식욕을 자기 의지만으로 이겨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일단 다이어트에 성공하고도 곧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반동현상이 생기는 확률이 85%나 된다고 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다이어트를 한 사람 중 15%만이 자기 체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군대생활, 골프, 마라톤, 볼링, 태권도, 인생, 유학 생활, 주식투자, 공부, 다이어트 등 성공과 행복의 궁극적인 비결은 자기와의 싸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즉 가장 큰 승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자기와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마음은 두 자아의 치열한 싸움터입니다. 선한 자기와 악한 자기와의 싸움, 부지런한 자기와 게으른 자기와의 싸움, 용감한 자기와 비겁한 자기와의 싸움, 너그러운 자기와 옹졸한 자기와의 싸움, 성실한 자기와 불성실한 자기와의 싸움, 육의 자기와 영의 자기와의 싸움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항상 벌어집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어느 자기가 이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됩니다. 선한 자기와 악한 자기가 싸울 때 악한 자기가 이기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게으른 자기와 부지런한 자기가 싸울 때 게으른 자기가 이기면 게으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육의 자기와 영의 자기가 싸울 때 육의 자기가 이기면 결국 육을 좇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위고는 인간은 세 가지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기와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자기와 사회와의 싸움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자기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영적 싸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의 싸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은 먼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를 이기는 자는 무엇이라도 다 이길 수 있으나, 반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의 성경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즉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요,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외부로부터의 도전보다는 내 안에서부터 오는 도전이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지를 괴롭히고, 나를 죄악으로 이끄는 세력은 외부에서 보다 내 안에서부터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도 이겼고, 목동으로 있으면서 사자와 곰과의 싸움과도 이겼고, 수많은 전쟁에서도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보는 순간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정욕과의 싸움에서 패하므로 남의 아내를 간음하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는 편안하고 한가한 가운데 자기 속에서부터 오는 도전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보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은 외적인 적인 로마의 박해를 꿋꿋하게 잘 견디고 계속 복음을 전파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그들은 내부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내면의 적인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패하므로 결국 기독교는 중세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시험을 당하는 가장 큰 요인도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닙니까 ? 남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환경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 일단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외부의 적은 결코 우리를 시험에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이솝 우화 중에 파리와 좀나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먹다가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먹으면 될 텐데 조금 더 조금 더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파리는 날개가 꿀에 젖어서 도저히 날 수가 없게 되고, 그냥 거기서 꿀 좀 먹다가 죽어 버리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신세가 됐을 때에 좀나비라 하는 나비가 펄펄 날면서 파리를 비웃었습니다. "야- 파리야, 아니 조그만 놈이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 걸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냐 ? 이 미련한 놈아 !"
그러다가 해가 졌습니다. 한 농부가 밤이 되어 등불을 켰더니 좀나비들이 모여드는데 불 가까이로 막 모여들다가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나비가 모여들다가 그만 그 속에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파리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야- 이 미련한 좀나비야, 너는 나 보다 훨씬 더 바보다."
즉 자기 욕심,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끌려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파리와 좀나비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의 타락한 마음, 잘못된 인격, 좋지 못한 습관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우리도 결국 파리와 좀나비의 인생이 되고 맙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사도 바울은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한다."(고전9:27)고 말했습니다. 즉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냥 내 멋대로 내버려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예를 길들이듯이 나를 쳐서 복종케 해야만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자기를 쳐서 복종케하지 않으면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자기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합니다. 즉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질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병이 있기에 자신은 겸손할 수 있고, 이것이 아니면 자신은 교만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자신을 계속 찔러야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도저히 설 수가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기 훈련이요, 자기 연단입니다. 신앙 세계에서 싸우는 것은 그 어떤 다른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마귀와의 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늘 패배를 맛보면서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만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구세주가 되었지 만약 예수님이 자기와의 싸움에 져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갔다면 어찌 우리의 구세주가 되었겠습니까 ?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와의 싸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냥 내려왔다면 만민의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오늘 나 한 사람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때 비로소 가정이, 교회가, 하늘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나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라는 존재가 그렇게 완벽하고 믿을만한 존재입니까 ?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어 주셨고, 또한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시자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오늘날도 우리 마음 속에 오셔서 우리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고로 이 외국 땅에서도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므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를 맛보며 그에 따른 천국의 평안과 기쁨, 축복과 행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