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35-39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행복해졌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왜 행복할까요? 어찌 보면 하나님을 믿을 때에 시간 빼앗기고, 물질 빼앗기고, 마음 빼앗기고, 때로는 기족도 빼앗기고, 종종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때에는 무서운 핍박으로 인해 몸서리쳐질 고문도 당하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데 도대체 왜 행복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마약이나 아편과 같아서 자기가 파멸을 당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잠시 행복한 것과 같은 그런 거짓 행복에 빠진 것입니까? 아니면 종교라고 하는 최면술에 걸려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입니까? 혹은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별로 행복하지 않는데 그냥 자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남에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영어로 "나는 아주 행복하다."는 표현을 쓸 때에 "I am on the ninth cloud.(나는 아홉 번째 구름 위에 떠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글쎄요. 저는 솔직히 이 표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구름을 타고 다니는 손오공은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손오공은 소설 속의 인물이니 물어볼 수도 없고... 혹시 여기에 구름타고 다니시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이 영어 표현이 어느 정도 행복을 가리키는지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나중에 저에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어로 굉장히 행복하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짜릿짜릿하게 행복해요." "무지무지하게 행복해요." "정말로, 참말로, 진짜로, 행복해요." "행복해서 미치겠어요."
여러분, 요즘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교회에서 지금 누가 가장 행복할까요? 그리고 여기 캘거리 한인 사회에서 누가 가장 행복할까요? 만약 행복을 점수로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서 몇 점이 되어야 행복한 사람 편에 들까요? 그리고 그렇게 행복한 사람은 도대체 왜 행복할까요?
지난 2003년에 서울대 사회발전 연구소가 전국의 20살 이상 된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평균 66.5점이었다고 합니다. 60점을 행복과 불행의 커트라인으로 본다면 간신히 불행을 면하고 사는 수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나라 캐나다로 이민이나 유학 온 여러분들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대답해 보세요. 99점입니까? 88점입니까? 77점입니까? 한국 사람들의 평균 점수인 66점입니까?
그리고 이 조사에서 행복한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약 70%가 건강을 꼽았습니다. 다음이 경제력이 약11%이고, 사랑이 6.5%, 신앙이 5.2%, 안정된 직장이 2.8%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약 이 조사 내용대로 행복이 결정된다면 안정된 직장을 잃으면 조금 불행해진 것이고, 돈을 많이 잃으면 상당히 불행해진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아주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죽음이 다가오면 완전히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초대 교회 때에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성도님들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경우 재물도 다 잃었습니다. 가족도 잃었습니다. 건강도 박살이 났습니다. 세상 명예도 모두 잃었습니다. 고로 그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에 보면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아서 사자 밥이 되게 하고, 화형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을 살펴보다가 의문에 빠집니다. 한 성도의 죽은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거 왜 이럽니까? 죽음 앞에서는 불행해져야 하는데 도리어 죽으면서도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찌나 큰지 그 사랑의 힘으로 죽음도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받기 전에는 이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하면서 실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당시의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습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도 받고 있다면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죽은 사람은 감정이 없잖아요. 죽은 사람은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거나, 사랑을 주거나 받거나 하지 못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곁에서, 혹은 우리 안에서 그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사랑은 의지적이고 지식적인 면만이 아니고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나를, 너를,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믿으면서 이 구절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같이 함께 암송해보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마 이 구절은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도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자도 안 믿는 자도 지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그 사랑에 감격해서 며칠 몇날을 울고 또 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합니다. 그것도 아주 기쁘고 행복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지만 마음에 별 감동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남녀가 사랑하는 것만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거나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처녀총각들을 보면 하나님을 제법 열심히 믿다가 애인이 생기고, 그 애인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애인 사랑만큼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쉽게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나그네가 혼자 사막 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 목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고통스럽게 외칩니다. 물-- 물-- 물-- 그렇게 그 나그네는 물을 외치다고 쓰러져 목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 옆에 보니 사막에서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게도 그 나그네는 샘물을 옆에 두고 목이 말라 죽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하면 목마른 나그네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믿다가도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맙니다. 더구나 믿다가 환난이 올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이길 힘이 없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쓰러진 사람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샘물이 필요합니다. 오늘 인생 살기가 힘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샘물을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5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일까요? 하나님을 만났던 날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저의 육신의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 분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혹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하실는지 모릅니다. "아니, 목사님, 분명히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어찌 그 분의 모습도 모릅니까? 그래서야 어찌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인간육체와 같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날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이 나에게 들어 임했습니다. 나는 그 사랑을 받고 너무나 감격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무한한 평안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아- 행복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는 다니고, 가끔 철야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도 가끔은 빼먹어도 제법 드리고, 성경 퀴즈 대회도 나갔지만 그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까지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줄은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에는 신앙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나에게 그 큰 사랑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차원이 다른 신앙인으로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마치 모성애가 충만한 여인이 자기 자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보다 크시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도 능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죽음도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도 사랑합니다. 저런 사람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도 사랑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나 같은 못난이도, 나 같은 철부지도, 나 같은 웬수도 사랑합니다. 왜 나를 그렇게 사랑 하냐고, 무슨 속셈이 있어서 나를 사랑 하냐고 그렇게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Unconditional Love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느낍니다. 고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 안타깝습니다. 불행합니다. 주여- 이 큰 사랑을 느끼게 하옵소서!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 큰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솔직히 무리한 부탁입니다.
사랑을 생전 받아보지도 못하고 느껴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남을 사랑하라고 몰아붙인다면 그 얼마나 무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너도 나도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오늘 그 사랑을 느끼게 해달라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나도 며칠 몇날을 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날짜:
201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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