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2:10-14 일어나 함께 가자!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마리아라는 여인과 트랩 대령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원래 마리아는 수녀 서약을 마친 견습 수녀로서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수녀원장의 명령에 따라서 어떤 집의 가정교사로 잠깐 파견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이들의 아빠인 트랩 대령을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그 집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수녀원으로 돌아 온 후엔 몇 날 며칠을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만나기를 원치 않고, 다만 회개 기도만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모든 수녀들이 걱정을 하는 가운데 그 소식이 원장에게까지 들어갑니다. 수녀원장이 그녀를 호출하고, 그 자리에서 원장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도저히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노라 하는 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짐작한 원장이 아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남자를 사랑하게 됐나요?" 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마리아는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떱니다. 정말 주님께 바쳐진 자신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지 원장 앞에서 몹시 자책합니다. 바로 그때 마리아에게 던진 수녀원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성스러운 거예요." 이 말에서 앞의 생략된 말까지 넣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마리아!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 뿐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도 거룩한 거예요!"
그리고는 마리아를 트랩 대령의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수녀지만 트랩 대령과 결혼을 합니다. 지금까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의 한 스토리입니다. 여러분!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남녀 간의 사랑을 불결하다고 보시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들을 부부로 맺어주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이 없으면 인류는 존속되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남녀가 사랑하는 일을 막으시거나 싫어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랑이 불륜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공부할 학생이 너무 일찍 남녀 간의 사랑에 빠져 공부는 못하고 탈선을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여간 하나님은 남녀 간의 사랑도 소중하게 생각하셔서 그것을 노래한 성경도 남기셨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아름다울 ‘아(雅)’자(字)를 써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의 노래’ 라는 뜻입니다. 바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내용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직설적인지 과연 이게 성경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아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교독해 나간다면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힐 만큼 민망한 장면이 꽤 여러 번 나옵니다. 그만큼 야하고 외설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즉 아가서에 나오는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아가서를 쓴 사람은 솔로몬 왕입니다. 이것을 쓴 시기는 이스라엘이 가장 강대국일 때인 주전 950년 전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의 편지는 솔로몬이 천하를 호령할 때, 즉 그의 말 한 마디에 안 될 일이 없고 그의 명령이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할 때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한 여인에게 사랑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애달파하며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상대 여인은 술람미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술람미는 헬몬산 기슭의 수넴이란 조그만 동네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솔로몬은 지존의 몸으로 아주 평범한 한 시골 여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청혼하고 결혼해서 그 사랑을 성숙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솔로몬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합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즉 청혼을 하는 것입니다.
한 시골 소녀가 왕으로부터 청혼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일까요? 자매들은 어릴 때부터 다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어 봤을 텐데, 지금 바로 이 여인에게 그런 행운이 떨어진 겁니다. 그런데 왕 정도에게 청혼을 받자면 그만큼 아름답고 품격 있는 여인이 아니겠나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여인은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여인이 자기 동료에게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아가서 1:5-6절입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은 햇빛에 얼굴이 타서 검게 되었습니다. 뭔가 오빠들에게 미움을 사서 포도원이나 지키고 있던 여자였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왕이 반할만한 어디 아름다울 구석이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정말 평범한 여자,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못난 여인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여인이 솔로몬의 눈에 들었고, 솔로몬은 이 여인이 자기를 따라 오지 않을까 봐 몹시 맘 졸여 하고 있는 겁니다. 남녀관계란 참 묘합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어울리고,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커플이 의외로 잘 맺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런 겁니다. 어떤 남자는 여자가 치약 거품을 하얗게 물고 이 닦는데 반해서 결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소유나 외모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 속엔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 한 가지 때문에 사랑을 받을 만한 뭔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고로 자기는 사랑 받을 구석이 없다고 미리 단정 짓거나 비교의식에 젖어서 열등감을 갖는 것은 절대 좋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의식만 가지고 있으면 어느 날 이렇게 뜻밖의 사람에게 청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아가서는 한 연인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또 신약의 개념으로 말씀 드리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아가서의 말씀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거기에 내가 빠져 있다면 그 말씀은 우리와는 별개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이야기고 우리 교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묵상하는 내내 삼중구조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첫째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의 이야기, 둘째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셋째는 예수님과 우리 교회와의 관계, 그렇게 읽어내야만 오늘 내용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더라도 거기에 나, 또는 교회 이야기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더러 함께 가자고 하시는 분은, 우리로서는 감당 못할 하나님이시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대통령이 우리에게 전화해서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고 말했다면 거기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즉 "나랑 일 할 동안 생활하는 것은 걱정 마시오. 자녀 학비 걱정 마시오. 당신의 신분은 내가 보장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당신은 free-pass요. 누구를 만나든 걱정 붙들어 매시오. 통역과 보좌관을 붙여주겠소.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대시오. 당신은 내 권력을 가졌소. 당신은 또 하나의 나요." 이런 얘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자각은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거지 옷을 입었어도 그가 왕의 아들이면 그의 신분은 왕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복을 입고 평민처럼 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으면 우리는 신의 아들이요, 신의 딸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평복 속에 감춰진 화려한 궁중의상의 가치를 못 느낍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던지 그 하나님이 아기가 돼서 직접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그 비밀을 강 건너 등불처럼, 내 일이 아닌 듯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약속을 보장받고 실제 그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삽니다. 솔로몬의 청혼을 받은 술람미 여인 역시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을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나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을 제대로 못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면서 그럴 이유를 11-13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시는 대로 유대 땅은 겨울철이 우기입니다. 즉 비가 그치면 곧 바로 봄입니다. 고로 지금 '일어나 함께 가자.' 하는 것은 모든 게 약동하는 이 계절에 결혼식을 올리러 왕궁으로 가자고 신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 장면에는 어두운 구석이 없습니다. 환희가 있고, 명랑함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신부인 우리가 어두운 곳에 처박혀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때때로 고난이 오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이 있는 신랑 되신 되시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고로 신부인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께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맡기며 환한 신부의 모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콩쿠르이나 작품 응모에 출품하는 사람들은 늘 비슷한 걱정을 한답니다. 혹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을 안 보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랍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 입장에서는 어떠냐하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늦게 들어 온 작품이라도 꼭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보면 꼭 그렇게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작품을 봤다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혹 우리의 처지를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으실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형편을 아신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셔서는 안 되는데 무소식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우리 하나님 역시 모른 척 수수방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 때문에 그게 침묵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술람미 여인에게 보내는 솔로몬의 관심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은 어떠냐 하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술람미 여인은 연약함과 순결함의 대명사인 비둘기로 비유되고 있고, 그 비둘기는 지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안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힘내야 될 것은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와 마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과 상태를 아시는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뭔가를 하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온 힘은 그런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이 우리를 두루 살폈기 때문입니다.
이 아가서는 8장까지로 되어 있는 짧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8장 안에서도 여러 번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2:7의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잊을 만하면 또 나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이 특별히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 신부가 자고 있으니 원하기 전에는 깨우지 말고 가만히 두라는 것입니다.
말은 정중하게 부탁한다고 했지만, 왕의 부탁은 사실 명령 그 이상이라는 것을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신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왕은 금방 군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투입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여기저기 보호망을 쳐 두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여 누군가가 비둘기같이 연약한 우리를 해코지 할까봐 눈을 치켜뜨고 계신다는 겁니다.
이제 그런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말이 부탁이지 사실은 우리를 간절히 사랑하는 고백이나 다름없습니다. 첫째는, 얼굴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햇볕에 탄 얼굴이 뭐 그리 볼 게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우리를 보지 않으면 못 견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 얼굴을 주님께 자주 보여 드리는 겁니다. 예배에 집중하라는 말씀도 되겠고, 교회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신부요 연인인 우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 주고, 복주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쪽에서 더 갈망해야 될 부분인데, 지금 하나님은 당신 쪽에서 그것을 더 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일어나 함께 가자!"라는 말씀은 좀 더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달라는 것이고, 보이는 현실에 너무 겁먹지 말고 당신에게 관심을 좀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말씀 끝에 보면,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시는 부분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아름답게 봐 주신다는 겁니다. 고로 하나님께 내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면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봉사하는 자리에, 헌신하는 자리에 더 자주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다가 가셔서 "사랑하는 나의 신부여! 일어나 함께 가자." 부르시는 그 초청에 즐거이 따르는 신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소리를 듣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직역을 해도 상관없고 의역을 해도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연약한 자들을 위로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 때문에 애통해 할 때, 한숨 쉬고 괴로워할 때, 어떻게 할지 몰라 흔들릴 때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에게 지금 절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우리 소리를 들려드려서 우리 존재를 알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야 하나님이 뭔가를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기도로, 찬양으로, 연주로, 격려와 칭찬하는 것으로 우리 소리를 하나님께 들려 드립시다. 우리의 소리를 하나님은 듣기 원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신부로 부르시는 주님과 함께 가십시다. 우리의 얼굴을 보여 드리고, 우리의 소리를 들려 드리십시다. 또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리십시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더 더욱 주님이 보호하실 것을 믿으십시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날짜:
201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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