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원 더 높은 감사를

날짜: 
2012/07/30
설교: 

합3:16-19 한 차원 더 높은 감사를
제가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해 오면서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그 기준이 딱 한 가지로 갈리는 것을 봤습니다. 물론 어떻게 그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냐 하시겠지만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 기준은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사라지면 여러분의 삶은 그때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게 될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면 올릴수록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 감사하면 여러분의 지경은 점점 넓어질 것이고, 그 감사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행복해질 겁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 마음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겁니다.
일도 찾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일이 생겨야 마지못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게 나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감사' 역시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할 제목을 찾아서 감사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한 차원 더 높은 감사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처음에는 감사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감사를 잊어버리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그 감사의 조건은 어느덧 불평의 조건이 되고 맙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받아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는 왜 매일 만나만 주느냐고 불평하고 말았습니다. 만나가 싫다고 했습니다. 만나가 지긋지긋하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만나를 매일같이 주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불평소리를 듣고 "너희들 만나가 싫으니? 그러면 안 내리지 뭐!" 하고 내리던 만나를 거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금방 굶주려 죽고 맙니다.
고로 만나가 싫어도 불평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40년간 양식을 공급했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매일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양식을 40년간 공짜로 받아먹으면서 감사는커녕 늘 불평만 한다면 어찌 그 사람을 옳다고 하며 어찌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대하고 있는 말씀은 하박국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전 600년쯤 유다의 여호야김왕 때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이 하박국서는 석 장으로 되어있는 짧은 성경이지만 그 내용이 대단히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하박국 선지자를 이스라엘 철학의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짧기 때문에 단 10분이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똑같이 공감할 텐데, 이 성경을 읽고 나면 속이 후련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생기는 의문들이 있지요? 무척 많지만 간추려 보면 몇 가지로 압축이 되는데, 바로 그것을 이 하박국 선지자가 우리 대신 하나님께 질문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답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1장은 질문이요, 2장은 응답이요, 3장은 찬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3장 맨 앞을 보면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이란 단어는 생소한 단어지요? 찾아봤더니 이것은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라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놀랄 만큼 아름답고 장엄한 곡조를 붙여서 합창으로 불러라."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3장 19절 마지막을 보시면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고 끝이 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3장 전체는 성가대의 찬양곡이라는 것입니다.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고 영장으로 맞춘 노래 즉, 지휘자가 있어서 지휘에 맞춰 성가대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 부르는 감사와 찬양의 특별한 순서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유의 깊게 봐야 할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찬양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감사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하박국 선지자가 그렇게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얼마나 감사하면 그렇게 장엄한 성가대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당시 유다의 전후 상황을 좀 살펴봐야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하박국 선지자 시절에 가장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요시야왕의 죽음이었습니다. 주전 609년에 죽은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보기 드문 성군(聖君)이었습니다. 이방신과 우상을 타파하고, 그 모든 세부지침을 나라의 구석구석에까지 알릴만큼 열정 있는 왕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통해서 유다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종교가 달라지니 정치와 경제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니 나라 전체가 도덕적으로 바로 세워지게 됐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숨을 쉬고, 부자들도 삶의 질서를 따라 나누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라 전체가 안정을 되찾았던 겁니다. 유다는 모처럼 평안과 기쁨이 가득한 나라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시야 왕이 죽자 유다 사회는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변합니다. 정치적인 강포와 경제적인 무질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게 되고, 악인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울분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를 억압하는 세상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하박국 2장에서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는데 그 응답이라는 게 동문서답(東問西答)입니다.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멸망시키겠다는 겁니다. 하박국은 참을 수 없어서 더 심한 울분을 터뜨립니다. "하나님 그게 또 무슨 말씀입니까? 왜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우리 유다를 멸망시키시려는 겁니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재차 응답을 하시자, 오랜 묵상 끝에 그것을 깨달은 선지자가 3장에서 드디어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한 감사로 끝납니다. 오늘 선지자가 한 질문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그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왜 그렇게 섭리하십니까?', 셋째는 ‘하나님 왜 하필이면 악인을 사용하십니까?’ 그것입니다.
사실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울분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애급에서 나올 때부터 축복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책으로 기록해서 약속했던 거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 우리가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래! 이렇게 살아라." 하시면서 율법책을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신명기서였습니다.
여러분! 신명기서가 어떤 책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그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번영을 아주 확실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면 벌을 받아서 세상에서도 망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신명기의 화려한 약속을 보면,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을 줍니다. 복 받는 얘기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이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282-7)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신28:7-10)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28:11-13)
정말 꿀 송이처럼 단 성경 구절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하박국 시대는 어떤 형편입니까? 신명기에 약속한 축복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대적들이 쳐들어오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해주신다."더니 오히려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침략하도록 시키십니다. 또 말씀 드린 대로 유다의 사회상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못사는 풍토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하박국이 울분을 터뜨린 겁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믿으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무엇 때문에 갈대아 사람의 침략을 받아야 하고, 나쁜 짓 안하고 죄 없이 살려고 하는 사람이 왜 이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 얘깁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하박국의 질문과 울분이 나오는데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이런 얘깁니다.
"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설사 우리 유다 민족이 잘못이 있다 칩시다. 그래도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침략자로 사는 갈대아 사람보다는 의롭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바벨론 사람을 일으켜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살육하고 빼앗고 재앙을 만나게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모순입니다. 갈대아 사람이 우리 민족을 파멸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하십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수도 없이 많은 질문과 울분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무도 간단하게 단 한 마디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 후에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 돌아섰는지 아무 설명 없이 찬양을 시작합니다. 그 하나님의 한 마디가 뭐냐? 로마서 전체의 주제가 됐던 말씀이고 마르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킨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박국 2:4 말씀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에서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갈대아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하고는 달라. 내 생각은 깊고 넓기 때문에 너희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 피조물의 삶이란 자기 형편과 기준을 갖다 대고 하나님께 따지고 덤벼드는 그런 삶이 아니야. 오히려 자기가 겪는 모든 고난과 일들이 내 섭리 가운데 주어진 거라고 굳게 믿는 거야. 결국 끝에 이기는 사람은 너희인 거란다.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야!"
계속되는 하박국 말씀 가운데 우리는 이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겁니다. 하박국이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고민에 빠집니다. 당장 얼마 안 있어 바벨론 족속들이 밀물처럼 쳐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 심적 부담과 공포가 어땠는지 16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한 마디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인 것입니다. 무서워서 어찌 할 바 모르고 혼이 나간 모습입니다. 이런 전쟁의 위협 가운데 또 지금 유다가 처한 조건은 어떻습니까? 처참할 정도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모든 게 다 없는 겁니다.
그 짧은 한 절 속에 부정어가 6번이나 반복됩니다.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나무(올리브) 입니다. 그런데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 통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지요?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력과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그런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오히려 감사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 감사와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조건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지만 여전히 자기에게는 소중한 게 남아있음을 찬양합니다. 그게 뭡니까?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세상 모든 게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은 항상 자기와 함께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다 같이 보십시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아멘!"
하박국이 믿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겐 아무 것도 없고 고통과 궁핍만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이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니까 하박국의 마음속에 샘솟듯 기쁨이 넘쳤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겉에 보이는 조건들은 시간이 가면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조건이 된다면 언젠가는 실망할 것입니다. 아울러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다 잃고 말 겁니다. 행복하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지지도 않고, 변치도 않는 것을 기쁨과 감사의 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어보십시오. 언젠가 자신에게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믿어 보십시오. 어느 날 그도 당신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 죽거나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명예나 돈을 믿어 보십시오. 어느 날 돈이 갑자기 사라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어 보십시오. 그러면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박국은 정말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면 부족할 게 무엇입니까? 다 된 거 아닐까요? 그 이상 바랄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확실히 만난 사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빼앗기지 않는 전부’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대주제는 딱 하나입니다. 내가 참으로 감사할 이유는, 내가 참으로 기뻐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차원 더 높은 감사입니다. 감사할 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감사지만, 감사할 조건이 없더라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합니까? 물질이 풍성하기 때문입니까?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직장이나 사업장이 잘되기 때문입니까? 자녀들이 잘되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감사합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이유들이 있을 때만 감사한다면 만일 그 이유들이 사라질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망하겠습니까? 고통스러워하겠습니까? 자포자기 하겠습니까?
여러분! 감사의 외적인 이유들이 사라져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혹 잃을 때가 있지요? 하지만 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믿는 우리는 괜찮습니다. 그럴 때조차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겁니다. 회복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다시 승리케 해주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 차원 더 높은 감사로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