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나무를 베어서 파는 사람이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데 갑자기 총을 든 사람이 “너는 누구냐?”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옛날 한국에서 간첩 수색대가 깊은 산에서 사람 소리가 나니까 간첩인줄 알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해다 파는 그 사람은 그 후에 “너는 누구냐?” “뭐하는 사람이냐?”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아 그 이후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실존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시고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16:13-17).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때 제자들이 피하라고 하자, 주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의 갈 길을 갈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31-33).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환경의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이 주님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롬1:1) 그래서 바울은 기근이나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오리들과 달라서 다른 오리들한테 늘 못생겼다고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백조의 무리를 보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도 한 마리 아름다운 백조로서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미운 오리새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호랑이 맞아? 나는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그러자 어미는 상냥하게 대답합니다. “그럼, 너는 내가 낳은 새끼니까 틀림없는 호랑이다.” 그러자 새끼가 또 물어 봅니다. “나는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진짜 맞아?”
새끼가 자꾸 귀찮게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호랑이 새끼가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호랑이 새끼가 비록 어려서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요, 사람은 사람입니다. 내 자신이 비록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이 좀 부족해도 일단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먹고 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폭격의 충격으로 수많은 프랑스 군인이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자료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더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이 군인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서 가족들과 만날 수 있도록 파리에서 만남의 광장을 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 제안은 즉시 받아들여져서 프랑스 전역에 공고가 되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던 날, 파리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군인들은 한 사람씩 높은 단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제발 내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 안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 군인들은 얼마나 애가 타고 답답했겠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압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나라를 상속받을 그분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즉 우리의 신분에 대한 질문과 답변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제대로 처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인생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바울은 서신 맨 처음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의 관계에서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바울은 이스라엘 최고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집안도 좋았고, 부와 명예와 권력 중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갖추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이 다메섹 길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즉시 자기의 정체성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 뉘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주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자신의 주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고 난 후 그는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귀걸이 하기를 좋아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귀를 뚫는 것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7년마다 안식년을 보내는데 이때는 모든 것이 그 이전상태로 회복이 됩니다. 데리고 있던 종들도 안식년에는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만약 안식년에 풀려나는 종이 주인이 너무 좋아서 스스로 주인의 종이 되기를 원하면 주인은 그 종의 귀를 뚫습니다. 귀를 뚫으면 안식년이 되어도 여전히 풀려나지 않고 계속 종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억지로 된 종이 아니라 스스로 된 종, 기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서로에게 종이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하여 종으로서의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도 바울의 행복과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즉 이전에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는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고,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나는 오히려 그 분의 종이 된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면 인생이 바뀝니다. 나를 위한 인생에서 주님을 위한 인생으로 살려고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인생보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장사를 해도, 사업을 해도, 직장을 얻어도, 공부를 해도, 모두 주인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나의 존재가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분의 종이기 때문에, 나는 주인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인님께 순종하고 주인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즉 해야 할 어떤 일이 있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6절에 보면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일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면 예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내가 보냄을 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보냄을 받았는지에 따라 나의 사명, 나의 인생이 결정되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예수님 안에서 누구인가를 깨닫게 될 때,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자 영국의 안정된 직업에서 떠나 저 아프리카 밀림으로 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자 유고슬라비아(현 알바니아)의 유복한 가정을 떠나 인도 빈민굴로 가서 소외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인도뿐 아닌 이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줄 모르는 인생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하므로 자신의 삶을 영광스럽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자칫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세상의 권력 앞에 비굴해지고, 물질을 탐하고 세상을 좇아가는 추한 인생, 타락한 인생을 살기가 쉽습니다. 고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셨던 것 같이 우리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 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요, 그 분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로 나는 나의 사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결코 방황하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혹시 잠깐 동안 나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여 잠시 사명을 잃어버리고 타락을 길로 빠지기도 했지만, 다시 나의 존재를 깨달으니 이제는 이 캐나다 땅에서도 바르게 사명 감당하고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하게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종이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중에 그 날 주인님으로부터 칭찬의 소리를 듣고 주인의 즐거움과 행복에 다 함께 참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며, 세상의 가치관에 요동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힘들어도 어려워도 사명을 달성하며 끝까지 잘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