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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차를 몰고 밴쿠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웬일인지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습니다. 차는 무서운 속도로 치닫는데 등에선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찔해 졌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휴가 때 진짜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탈길에서 브레이크를 밟는데 핸들을 비롯해 차가 심하게 떨렸습니다. 결국 영행 중에 피곤하게 계속 엔진 브레이크를 쓰면서 여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차가 통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브레이크(엑셀, 깜박이, 핸들)를 밟아도 통제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아찔한 상황이 아닙니까? 더구나 비행기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이전에 있었던 케네디가의 사망사건도 바로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비행기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컴퓨터가 통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1999년도에 사람들이 심한 불안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밀레니엄 버그 때문이었습니다. 2000년이 되면 컴퓨터가 2000년이란 숫자를 읽지 못하므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되면 가스, 수도, 전기 중단 사태나, 각종 정밀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게 되고 이로 인해 큰 혼동과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의 종으로 목회하면서 가끔 통제되지 않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가 모두에게 큰 상처를 주고 결국 자신도 고통의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한 통제가 안 되는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말이 자녀에게 먹혀들어 가지 않아 자녀가 자기 멋대로 고집부리고 행동하며, 아내가가장인 남편에게 통제되지 않아 자기 멋대로 집나가고 행동한다면 그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자유가 좋아도 통제되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보기에 안 좋습니다. 여기서도 연을 날리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이 연은 실에 매달려 이리 저리 날려 다닙니다. 그러다가 문뜩 이 연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제발 날 좀 자유롭게 놔둬요.” 주인이 “오냐 알았다. 혼자 자유롭게 잘 살아라.” 하고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이 연은 마냥 자유로워 질 줄 알았는데 웬걸 그만 전봇대에 걸려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조롱합니다. “저 연이 자기 멋대로 살려다가 스스로 인생 망쳤네!” 여러분, 아무리 자유가 좋아도 연은 줄을 통해서 통제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부분이라도 뇌의 명령에 따라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중풍병 환자가 되고 마는 것처럼, 그리고 TV 탤런트가 아무리 연기가 좋아도 프로듀서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탤런트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봅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야구선수였습니다. 그 당시 야구 시합하는데 우리 팀이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리 편의 마지막 공격 시에 4번 타자선수가 안타를 침으로 순식간에 역전이 되고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날 안타를 친 선수는 바로 그 날이 억세게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감독은 그 선수에게 안전하게 번트 사인(sign)을 냈었는데 그만 방망이를 휘둘러 버린 것입니다. 이 선수 비록 안타는 쳤지만, 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됐지만, 감독의 지시를 어기므로 욕을 얻어먹고, 나중엔 선수 명단에서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이런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울왕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외모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인격도 괜찮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말씀합니다. “아말렉을 짐승까지도 남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살찐 짐승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 딴에는 착한 일 한다고 했지만 사울왕은 이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비극의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 나왔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많아도 통제가 되지 않고 질서가 갖춰지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 할 수 없는 콩가루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자기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도 중요합니다. 목사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괜히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면 그로 인해 서로가 힘들게 되고 맙니다.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소리와 자질을 갖추어도 지휘자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통순경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원활한 교통을 위해 자동차와 운전사를 통제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보다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성도를 세밀히 통제하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갑갑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통이 통제되어지지 않아 큰 사고가 나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더 큰 손실을 입게 되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통제되고 있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통제되지 않는 성도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수없이 못 말리는 사람,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의 결국을 보게 됩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큰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가나안 땅에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애급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를 뺏기는 고통을 당합니다. 빌라도를 보십시오. 그의 아내가 꿈을 계시를 받아 예수님에게 손대지 말라고 했지만 자기 빌라도는 명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죽이는 비극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통제하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가 우리를 더욱 유익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고 주관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큰 축복과 은혜를 베풀기 위합니다. 우리가 버린 자식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컨트롤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린 자식이 아니라 그 분의 친자녀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세밀히 컨트롤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컨트롤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육체적 가시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잘 났다고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통제수단으로 가시를 꽂아놓은 것입니다.
중요하고 세밀한 부분일수록 더욱 통제가 잘되어져야 합니다. 핵폭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핵폭탄은 얼마나 철저히 통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면 하나님께 세밀히 통제되어져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 세밀히 통제되어지는 가운데 얻는 진정한 자유와 축복과 행복을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