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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한국 사람들을 전도하든지, 이곳 캐나다 사람들을 전도하든지 전도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전도를 못하는 이유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결과가 어찌하든지 항상 전도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을 합니다. 오늘은 몇몇 분들에게는 별로 흥미를 끄는 주제가 아닐지라도, 전도는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므로 전도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 숨을 쉬고 밥은 매일 먹습니다. 그런데 왜 전도는 계절을 타고, 기분을 타고, 제약을 받는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전쟁을 하는 군인이 비가 온다고 전쟁을 안 하고 눈이 내리고 춥다고 전쟁을 안 합니까? 디모데후서 2:4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즉 전도하는 군사가 이런 저런 삶의 이유로 인해 전도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성도님들에게 종종 권면을 합니다. “전도 좀 하세요.” 성도님들이 대답합니다. “날씨가 따듯한 봄에 할게요.” 그런데 막상 날씨가 좋은 봄이 되니 잔칫집, 결혼식에 가고, 이리 저리 놀러가고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고 바쁩니다.
그러고 나서 말합니다. “아이고, 시간이 좀 나는 여름에 전도할게요.” 그런데 막상 여름이 되니 “어이구- 더워서 전도를 못하겠어요. 그리고 전도를 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벌거벗고 있어서요. 그리고 저도 더워서 휴가 좀 가야겠어요. 차라리 휴가 갔다 온 다음에 가을에는 꼭 전도를 하지요.”
그런데 가을이 되니 또 결혼식 및 각종 잔치 집에 가기 바쁩니다. 또 놀러가기 바쁩니다. “아이고, 목사님! 가을이 후딱 지나갔네요. 겨울에는 진짜 전도 할게요.” 그런데 막상 겨울이 되니 ”아이고, 추워서요. 눈이 많이 와서요. 도로가 미끄러워요.“ 하고 결국 사시사철 각종 이유 때문에 전도를 못합니다.
전도를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교회 못 나가요. 할 일이 있어서요. 얼마 전에 밭을 샀어요, 소를 샀어요. 저는 얼마 전에 장가가서요, 시집가서요, 교회 못가요.” 그렇게 전도를 해야 하는 사람도 이유가 많고, 전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도 교회에 못 오는 이유가 많습니다. 전도를 받고 전도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이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못 믿어 지옥에 가면 하나님이 그 책임을 전도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살았을 때에, 이 땅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에는 이미 다 전도가 되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그곳에는 전도할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국에까지 올라와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고 전도하려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 그 사람은 진짜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곳 천국에서의 찬양은 여기 이 땅에서의 찬양과 좀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전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 감사함을 아뢰는 찬양이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할렐루야!’입니다. 즉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의 찬양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말씀합니다. “엄히 명하노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즉 결혼식도 중요하고 장례식도 중요하지만 전도가 더 중요합니다. 진짜입니까?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을 합니다. “제 부친이 늙어서 조금 있으면 돌아가실 것 같은데... 먼저 제 부친의 장사를 치르고 난 후에 주님을 좇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죽은 자들로 죽은 사람 장례를 치르고 너는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하자.” 즉 전도는 집안의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중요하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저희 집안의 일입니다. 저희 누님이 33살 노처녀가 되어가 시집을 갔습니다. 물론 지금은 33살이 그리 노처녀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좀 심했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을 비롯해서 그 아래 동생인 저와 제 여동생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심한 교통체증이 뚫린 겁니다. 모두가 기뻐서 결혼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전날에 결혼식 음식을 준비하고 가장 바쁘게 일을 하셔야 하는 어머님이 아침부터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디 가신거야?” 식구들이 어머님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그날 오후 늦게 쯤에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도대체 어머님이 어디 가셨을까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그 날이 마침 한 달에 한 번 있는 교구 식구들이 기도원에 가는 날입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님이 그날따라 전도한 새신자를 데리고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게 해야 합니다. 물론 저희 어머님은 “아이고, 나는 내일 딸 결혼식이니 오늘 기도원 가는 것은 빠질게.” 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 어머님이 보여주신 것은 한 영혼을 전도해서 은혜 받게 하는 것이 결혼식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손수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노처녀 딸이 결혼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 되는데... 결혼식을 핑계로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못 말리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하고 전도하는 것이 결혼식이나 장례식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는 이차적이고 삼차적이고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교통사고가 나서 차 밑에 깔렸습니다. 조금 있으면 죽을 상황입니다. 이때 지나가던 행인들은 빨리 차를 들어서 그 깔린 사람을 구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행인들이 “아, 나는 지금 점심 먹으러 가야 해." "나는 사랑하는 애인과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지금 바빠."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차 밑에 깔린 여러분을 구출하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죽으면, 아니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가 죽으면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며칠 전에 중국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중국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낮 시간에 한 여성이, 한 어린 아이가 인신매매 단에게 인신매매를 당하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냥 신경도 안 쓰고, 경찰에 연락도 안하고, 눈길을 일부러 돌리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합니다. “아이고, 저런 나쁜 놈들! 아니, 저 여성이 인신매매를 당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나 몰라라 하고 도망을 가면 어떡해.”
이 상황을 우리들에게 적용을 해봅시다. 마귀가 한 영혼을 지옥에 끌고 가려고 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어떡합니까? 빨리 가서 구출해야 합니다. 너무도 다급한 상황입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엄히 명하노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3-4절에 보니 사욕을 좇고, 진리 거스리는 사람들, 즉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는 근신하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을 합니다.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우리는 이 말을 바꾸어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전도를 해야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2.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전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심지어 주의 일을 하는 데에도 자기가 나타나는 곳에서만 일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칭찬이 있는 곳에서만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늘 자기가 나타 내려하고, 늘 자기가 존귀와 영광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를 칭찬하셨나요?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후에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왜 그랬나요? 사람들이 그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이 있으면 우리도 굳이 자기를 높이려고 안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높아지면 충성한다고 말을 합니다. 알아줘야 전도한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것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묵묵히 착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3. 상처를 당할 때에도 전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제가 감동을 받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3:1의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즉 예수님은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와도, 그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오른편 강도를 전도하셨습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교구를 담당할 때의 일입니다. 50대 초반의 한 남성분이 허리 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을 제가 아직도 기억합니다. 장동휘 집사님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병원에 심방 가서 보니 그 분은 허리 디스크가 심하여 침대에 누워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주일 예배 때에 그 분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교구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누워서도 꼼짝 못하고 아프다는 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분이 간증을 합니다. “제가요, 수술을 기다리면서 같은 병실에 있는 허리 디스크 환자들에게 누워서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하나도 안 아프지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나님이 아픈 와중에도 전도하는 집사님을 보고 크게 감동하시고 집사님의 병을 기적으로 고쳐주셨군요.” 할렐루야! 아닌 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죽음의 순간까지도 전도하다가 죽는 분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님도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는 전도를 하다가 옥에 갇히고, 태장도 맞고, 돌도 맞고,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을 그렇게 당하는데도 끝까지 전도를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본 받아야하는 ‘keep on running mind'입니다. 오뚝이 신자입니다. 7전 8기의 신자입니다. 잠언 24:16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느니라.”고 했는데 죽을 때까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바울 사도는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했는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즉 피를 몽땅 쏟아내는 죽음의 순간까지 복음 전파에 열심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파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외국 땅에서도 환경이 어려워도,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처를 당해도 전도는 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전도를 하다가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