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이냐 무조건이냐?

날짜: 
2016/07/17
말씀: 
신7:7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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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부분의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이런 조건들을 내세웁니다. 키는 175cm 이상, 180cm 이상이면 더욱 좋고, 학벌은 반드시 대학을 나와야 하고, 하버드대나 서울대 같은 일류대면 더욱 좋다. 직업은 반드시 튼튼해야 되고, 돈은 적어도 아파트 한 채 정도 마련할 돈은 있어야 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시부모님은 절대로 모셔서는 안 되고, 인물은 데리고 다닐 만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조건의 배우자를 얻기 위해 제각기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다가 결국 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가 되어도 처음엔 조건을 많이 따집니다. 그리고 조건을 따지다 보니 자연히 부부싸움이 생기기도 하고, 그 조건이 도저히 맞지 않으면 이혼을 합니다. 요즈음 이혼율이 굉장히 높은 이유는 서로가 조건을 많이 따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결혼한 지 3-5년 사이의 부부 이혼율이 가장 많은 것은 그 기간엔 서로가 조건을 많이 따지고 조건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살다 보면 조건만으로는 결코 살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만큼 그렇게 완전하거나 훌륭한 존재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부가 살기 위해서는 조건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조건적인 부부가 되면 가정은 삭막해지고 맙니다. 조건적인 사회, 조건적인 교회 역시 삭막해지고 맙니다. 때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어야 따뜻한 가정, 따뜻한 사회, 따뜻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자녀가 비록 못났어도 부모가 그 자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듯이, 그래서 따뜻한 가정이 형성되듯이 크리스천의 삶 속에도 이러한 무조건적인 포용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나와 취미나 성격이 다르더라도, 비록 나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하면 그곳에는 평화가 깃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랑 취미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서 도저히 내가 사랑할 대상이 될 수는 없어!“라고 조건적인 사랑을 내세운다면 그곳에는 결코 진정한 평화가 깃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고, 앞으로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받은 그 사랑은 이리저리 따지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율법은 수많은 조건을 내세우고, 그 조건이 성립되어야 우리를 구원한다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조건이 성립이 안 되어도 오직 믿음만 있으면 우리를 구원해 주고 우리를 사랑해 준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인 믿음도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키가 180cm가 안되어도 사랑하십니다. 데리고 다닐 만큼 인물이 잘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돈이 없어도, 직장이 없어도, 학벌이 부족해도, 인격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썩여 드려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즉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미련하리만치 무조건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에는 공감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이런 이중적인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저런 사람을 택하시고, 뭐 저런 사람을 축복하시고, 뭐 저런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나 시험이 들어 교회에 못나오겠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되고, 나와 취미나 성격, 그리고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건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그 돈으로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창기와 더불어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몽땅 허비합니다.
그러고 나서 거지가 되어 배가 고파 죽을 신세가 되니 아버지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웬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납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종을 불러 묻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러자 종이 대답합니다. “예- 당신의 동생이 집에 다시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나이다.”
그러자 맏아들이 화를 내며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아니- 아버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먹어버린 저 못된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애야, 말이 된다. 네 동생은 비록 잘난 것 없고, 오히려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분 아버지가 만약 조건을 붙이시고 이리저리 따지는 사람이었다면 아비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야, 이 못된 녀석아! 이 아비 속을 그렇게 썩이고도 또 뻔뻔스럽게 돌아왔느냐?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라. 꼴도 보기 싫다.”
여러분,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종종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꼬치꼬치 조건을 따지고, 형사처럼 우리들의 약점을 들추는 복잡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머리를 굴려가며, 아주 복잡하게 조건을 따지고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복잡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복잡한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못난 점을 들추고 질책하는 복잡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담배를 끊고 난 후에 교회에 나오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담배를 하루 열 갑을 피워도 그 모습 그대로 나아오면 하나님은 그냥 받아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애야,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많이 피우느라고 너 굉장히 고생하는구나. 쯧쯧쯧, 참 안됐다. 그러나 나는 너를 무조건 사랑한단다. 너의 온 몸에 담배 냄새가 찌들어 구역질을 나게 만들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내 아들아, 담배를 피워도 좋다. 나에게 돌아오라. 나는 너를 무조건 사랑한단다.”
그리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와서 나중에 하나님 열심히 섬길게요.” 그러나 하나님은 안타깝게 말씀합니다. “애야, 내가 돈에 미치고 환장한 하나님인 줄 아니? 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구나. 나는 온 세상의 돈보다 너 한 사람이 더욱 귀중하단다.
애야, 어찌 너와 나의 사이가 돈의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돈이 없는 거지 하나님이냐? 돈 독이 든 수전노 하나님이냐? 너와 나의 사이는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란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어찌 돈과 조건으로 흥정되는 싸구려 사랑이더냐? 애야, 이것을 알아다오. 나는 너를 무조건 사랑한단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결코 조건이 아니란다. 비록 네가 나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리고 오늘도 네가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어도 나는 계속 너를 사랑한단다. 애야, 결코 잊지 말아라.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란다.“
여러분,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옵니까? 그 분이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깐깐한 하나님이라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그 분이 “너 왜 오늘 머리도 안 감고 냄새나게 해서 왔니? 에이, 더러워!“라고 말하고 질책하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까?
여러분, 왜 수많은 죄인들이, 창녀가, 그리고 강도가 예수님께 나오는 겁니까? 그 분이 “야- 이 더러운 것들아, 세상에 할 짓이 없어서 창녀 짓하고 강도짓 하니?”라고 책망하는 예수님이기에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분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도 인자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8:11)
그리고 죽음의 고통을 맛보며 신음하는 오른편 강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그리고 자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배고프지? 와서 조반을 먹어라.”(요21:12)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우습게,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작은 인간의 머리로 그 분의 사랑을 이렇다 저렇다 논할 것도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요,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 5천만 원어치의 사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5억 원 어치의 사랑을 주시면 힘껏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보시지요. 5억 원 어치의 사랑을 꼭 부탁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5억 원 어치의 사랑을 부어주고 자신이 내세운 조건을 하나님이 만족시켜주면 충성하고, 그 조건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면 늘 인상짓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제 관계 끊읍시다. 나 솔직히 말해서 5억 원 어치의 사랑을 부어 주지도 못하는 능력 없는 하나님하고는 연애하기 싫습니다. Bye, Bye!”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어떻게 하든지 조건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조건을 내세워 흥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슬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늘 조건이라는 고무줄을 가지고 하나님을 늦췄다 당겼다 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도, 사랑도 갖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할 수도, 항상 사랑할 수도, 항상 충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기뻐할 수 있고, 그들이 내세운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사랑하고, 그 조건이 갖추어 져야만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조건적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결코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율법은 조건이지만 복음은 조건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사랑은 조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조건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조건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조건을 아주 잘 충족시켜줘서 그 분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조건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역시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헌신, 봉사, 사랑을 합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주의 일을 하다가 때로는 오해를 받아도, 심히 어려움을 겪더라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성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계속 조건적으로 따지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무식하게 보여도 어린아이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대답은 스스로 해보십시오. 그러나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