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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노오만 빈센트 피일 목사님이 뉴욕의 길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그를 불러 세우고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아주 큰 문젯거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빈센트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그래요? 여기서 가까운 곳에 1만5천명의 인구가 있는데 그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문젯거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걱정에 싸인 그 남자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문제가 없는 그곳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저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빈센트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너머 공동묘지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모두가 문제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좋은 동네에 살아보려고 이곳저곳 이민을 생각해봅니다.
이전 한국 신문을 보니 조양은 이라는 한국의 깡패 두목이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가 순복음 신학교인 한세 대학교를 다녔고, 집사님의 직분도 받고 온가족이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도 여의도 순복음 교회 대성전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주례로 올렸습니다. 지금은 그가 깡패 두목이라고 남들이 불러 주는 것보다 조집사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을 합니다.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이 이민을 오고 싶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깡패 두목이다 보니 늘 도청과 감시의 대상이 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의 사생활까지 침범을 받아 늘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민 대상국을 찾는 중인데 그중 이곳 캐나다가 이민 오고 싶은 곳이라는 말을 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난 후 저는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 조양은 집사님이 이곳 우리 캘거리 순복음 중앙 교회에 오면 어떨까?”
“어휴, 그런 소리 마십시오. 목사님. 그가 오면 교회가 굉장히 살벌해질 겁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그 조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면 교회적으로 이런저런 유익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가족이 이곳으로 이민을 오게 될 때 한 가지 염려가 되는 것은 이곳도 역시 만만치 않은 동네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 제법 오랫동안 살면서 보니 이곳도 역시 사람 사는 동네요, 많은 문제가 있는 동네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당하는 그 문제들이 싫어서 이곳에 이민이나 유학을 오게 되면 처음에는 그 문제들에서 해방되어 “야- 여기가 천국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잘 왔다.”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점차 이곳에 살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야-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이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곳은 한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단지 공동묘지의 죽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호흡을 하고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문제가 없는 그곳에서 살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일평생 문제가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 분은 혹 안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공동묘지로 이민을 가야만 합니다. “어이구, 목사님,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문제가 있어도 여기서 사는 것이 났지 공동묘지로 이민 가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 공동묘지로 이민을 가기에는 60세가 아직 안되었으니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곳으로 이민을 간다고 우리 집사람도 즉시 따라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즉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제가 있어도 아직은 공동묘지가 아닌 이 땅에 살고 싶다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나 크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하게 다가오면 때로는 천국에 하루빨리 가고 싶다고 느끼곤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문제로 인해 고통하고 번민하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로 오늘 본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은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다가올 때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로 이민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풀어주시는 주님에게 나아와야 참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서 참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문제가 다가와도 예수님께 그 문제를 아뢰면 희한하게도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그러한 문제가 다가오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주님에게 나의 그 문제를 아뢰면 “걱정할 필요 없다. 일은 잘 풀어질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라는 확신과 함께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여러분, 지금 당하고 있는 그 문제로 인해 혹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문제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에 수심의 그림자가 드리우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역시 주님에게 나아와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문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는 주님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도 주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부르면서도 문제로 인해 고통하고 번민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여러분, 멍에라는 것은 소나 말의 목에 메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옥토는 별로 없고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고로 옛날에 밭을 갈 때는 짐승에게 멍에를 메워 밭을 갈게 됩니다. 특히 소 두 마리를 나란히 놓고 멍에를 메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한 마리가 힘이 세면 다른 한 마리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예수님께서 힘이 좋으시니까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벼운 법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누구나 멍에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 그리고 문제들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문제가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구나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주 쉽게 풀어질 수도 있고, 아주 어렵게 생각되어 스트레스와 번민 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같이 그 문제를 나누어지면 예수님은 힘이 좋으시기 때문에 그 문제는 쉬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직접 그 문제를 풀려고 하면 제대로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더 꼬이게 되고, 그로 인해 더 큰 번민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을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이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시68:19)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도 우리는 죄의 짐, 물질의 짐, 가정의 짐, 질병의 짐, 죽음의 무거운 짐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또 하나의 짐을 지도록 요청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멍에 즉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짐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문제를 풀어주고 영혼을 편히 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옛적 시절에 새들에게는 날개가 없었답니다. 하나님이 약한 새들이 하도 불쌍해서 날개를 달아 주었더니 새들은 처음에는 이 불편하고 무거운 것을 또 왜 우리에게 붙여주느냐고 모두가 불평하면서 펄쩍뛰었답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새가 그 귀찮다고 생각하는 짐을 감사로 받아들이자 그 짐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다른 모든 새들도 자기에게 붙여준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선물로 깨닫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 영혼의 날개와도 같습니다. 새가 날개가 귀찮다고 해서 잘라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새에게 있어서 날개는 부담스럽고 짐스러울 만큼 큽니다. 그러나 그 날개로 인해 새가 가볍게 높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짐을 지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문제는 더욱 가볍게 되고 쉽게 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높게 더 멀리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통과 번민에 빠질 때, 그 문제를 쉽게 푸는 법을 배우십시오. 어리석게 그 문제를 혼자 풀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를 혼자 풀려고 하면 오히려 그 짐은 무거워져 마침내 당신은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문제를 당신 스스로 완벽하게 풀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그 어렵고 무거운 문제를 쉽게 풀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주님에게 다가와 그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사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데 왜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 버거워 하십니까? 그리고 그 문제로 인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십니까? 오늘 주님 앞에 그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 그 문제를 맡기면 그 문제는 너무나도 쉽게 해결이 됩니다.
주님은 38년 동안 병들어 걷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있는 환자를 향해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그러자 그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친 듯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즉시 바다와 풍랑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지게 되었습니다.(마54:39) 그리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섞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하시니 그가 즉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38년 동안 꼼짝없이 누워있는 환자를 고치는 일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재우는 일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쉽게 그렇게 어려운 일들을 간단히 해결하셨습니다. 고로 당신의 보기에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주님께 맡겨보십시오. 그리고 기대해 보십시오. 그 문제는 너무나도 쉽게 해결이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