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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으면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기만 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글쎄올시다. 그렇지는 않지요.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믿고 계속 문제가 일어나면 누가 예수님을 믿어요?“라고 말을 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문제 속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믿어도 문제가 생기고, 예수님 안 믿어도 문제가 생긴다면 뭐하려고 시간 낭비하고, 돈 낭비하고, 몸 피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네요.”라고 말을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일어난 문제는 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문제는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만들어주고 가꾸어 주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여기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가 그 문제로 인해 번민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담대하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문제야, 너 또 왔냐? 오냐, 내가 상대해주마.” 하고 담대히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가 오면 그 앞에서 한숨을 짓고 낙심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믿음이 있던 사람이 문제가 터지면 금방 부정적이 되고 뒤로 후퇴하고 맙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성숙도는 문제를 대할 때의 태도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되지 못한 분들은 문제가 다가오면 “아니, 왜 하나님 믿는데 이런 문제가 다가오는 거야? 이거 하나님 없는 거 아니야? 괜히 하나님 믿었네!“ 하면서 신앙의 후퇴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믿다가 후퇴를 하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 나빠지게 됩니다. 사단이란 녀석이 아예 일어나지 못하도록 더욱 꽉꽉 누르고 또 누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문제가 터지면 그에 따라 즉시 원망불평이 터집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지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다가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르거나, 양식이 없거나, 고기반찬이 없거나 하면 대뜸 얼굴 색깔이 변합니다. “아니,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이 고생시키는 거야?” 하고 원망불평을 합니다. 그러다가 또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고, 하늘에서 만나와 고기반찬이 떨어지면 또다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즉 문제에 따라 신앙이 좌지우지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문제에 따라 신앙이 심하게 요동치고 변동이 됩니까? 아니면 문제가 있으나 없으나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굳센 신앙을 유지합니까? 그리고 문제에 눌려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하거나 신앙이 뒤로 후퇴합니까? 아니면 그 문제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기회로 삼습니까?
여러분,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문제는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통하여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보다 빨리 이룰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문제를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황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 문제가 왜 나에게 일어나는가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행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하나님, 그 동안은 고마웠었는데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네요. 이제 그만 오늘로 관계를 끊읍시다.”하고 자신이 상당히 결단력 있고 용감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물론 크리스천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다 납득이 되고 해석이 되면 좋겠지요. 그러나 때로는 직면한 문제가 잘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요즘 성경을 읽다 보면 자주자주 의문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선지자나 신앙의 사람들이 문제를 당하도록, 심하게 매를 맞도록, 혹은 죽도록 내버려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요셉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히도록 하셨고,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구덩이에 던짐을 받도록 하셨고, 바울이 탄 배가 세 번이나 파선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문제를 막으실 수 있는 분이신데 도대체 왜 그랬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를 당할 당시에는 더구나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문제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문제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더 확실히 나타났고, 문제를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신앙이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문제를 통하여 우리를 낙심케하고,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문제를 통하여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가지고 선을 이끌어내는 전공자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 뒤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문제가 다가와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늘 자신에게 붙어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육체의 가시입니다. 남의 질병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를 해주고,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그림자만 대도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발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예수라고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뜻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9) 할렐루야 !
그리고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즉 하나님이 바울에게 문제를 주신 것은 바울의 교만함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더욱 겸손하게 하므로 하나님이 바울에게 은혜를 계속 주려고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문제에 대한 주님의 뜻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 바울은 자기의 문제를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까? 교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떠나고, 교만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거두어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문제의 가시를 주어서 늘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하여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과 육성이 깨어져서 하나님께 쓸모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문제가 많은 다윗 왕은 그 문제를 통하여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깨어져 믿음의 사람,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솔로몬 왕은 노년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와 음란과 쾌락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합한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낮에 밖에 나가서 놀 때는 전혀 아빠, 엄마, 집 생각을 안 하고 재미있게 놉니다. 그러나 갑자기 위험한 일을 당할 때는 “엄마! 아빠!”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게 되면 그제야 절대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평상시 때에는 자기만을 의지하고 살다가 문제가 다가오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고문을 당하고 고역을 받게 되자 그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편안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었을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벽에 부딪치게 될 때에 그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여자와 결혼만 하면 예수님을 잘 믿겠습니다." "저는 아들이 없는데 귀한 아들 하나 주시면 예수님을 잘 믿겠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잘 믿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가 죽어가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또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게 될 때,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오히려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나 환난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마는 이러한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면 문제가 도리어 우리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 됨을 알게 됩니다. 고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여러분,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집니다. 고로 문제가 올 때 “어이구- 어쩌나!”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당황하거나, 한숨짓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아하, 올 것이 왔구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하셨으니 이 환난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외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은 문제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문제를 통하여 더욱 겸손하게 되고,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속히 이룰 수가 있습니다. 고로 크리스천인 우리에게는 있어서는 문제조차도 큰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