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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창세기에 보면 ‘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들이 항상 악하므로 하나님이 보시고 마음에 굉장히 근심하시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라는 사람을 보니 그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찢어질듯이 아프고 괴로워했던 하나님이 노아를 바라보면서는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노아 역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노아야,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너의 마음이 피곤하고 지쳤구나! 내가 너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내가 이 땅에 홍수를 일으켜 이 땅의 악을 제거하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식구들과 방주로 들어가 생명을 보존하라.”(창6:17-18)
그리고 하나님은 큰 홍수를 통하여 세상이 멸망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답답하고 허전한 노아에게 또다시 나타나시며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노아야,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9:7)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는 이렇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할 것을 노아에게 약속하시며 말씈ㅁ하셨습니다. “노아야,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 무지개가 나타나면 내가 내 언약을 기억하리라.”(창9:13-15)
그리고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창9:28-29) 즉 노아는 홍수와 심판이라는 큰 격동기를 지나면서 950세가 되도록 늘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그도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며 살다가 영원한 위로의 나라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노아처럼 좀더 깨끗하고 의롭게 살아보려는 우리에게 이 죄악의 세상은 어쩌면 큰 근심으로 다가와 우리의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더구나 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넘어지는 처절한 오늘날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안타까움과 함께 때로는 큰 슬픔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이국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다 보면 너무나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남편과 아내가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하고, 가족과 친구로부터 위로를 받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나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무지개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셔서 “노아야, 이제 두려워 말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9:7)고 하신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낮선 이국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70-80의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고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올리시며 나를 더욱 창대 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71:20-21)
여러분, 이 낮선 이국땅에 오셔서 때로는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 혼자 울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혹 견딜 수 없이 북받치는 감정 속에서 통곡하며 눈시울을 적셔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눈물을 닦으면서 새삼 ‘혼자임’을 발견할 때 고독과 적막감 속에 갈등을 겪지는 않으셨습니까?
바로 그럴 때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시며, 당신의 처진 어깨를 토닥거려주시며, 당신의 힘없는 손을 꼭 붙잡아 주시는 위로의 주님을 느껴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주님의 포근한 위로와 행복을 맛보며 다시 한 번 통곡하며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사랑하십니까?” 하고 고백해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이 낮선 나라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이 땅은 우리에게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땅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겠습니까? 더구나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며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우리가 어찌 이곳에서 일분일초라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사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위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큰 환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전진하며 나아가는 것도 바로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또한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힘을 다하여 주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는 위로가 너무나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민 생활도 힘들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 지치고 피곤할 때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사66:13)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영원한 위로를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2:16-17) ”여호와여 주는 나를 위로하심이니이다.“(시86:17)
여러분, 이민 생활에서 오는 답답함과 단순함 속에, 혹은 환난과 역경을 만나면서 마음이 처지고 힘들 때 우리는 위로의 주님을 만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로의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얻어야 너와 내가 힘을 얻고 살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각종 어려움 속에서 주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의 음성이 있어야 계속해서 주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하다 보니 설교가 그만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깊이 졸다가 바울의 설교가 길어지니까 졸음을 참지 못하고 삼층 발코니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만 그 청년이 죽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누구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설교를 졸리도록 길게 한 사도 바울을 탓하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청년에게 “야, 너 왜 예배시간에 졸다가 떨어져 죽었니?” 하고 탓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셨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따지겠습니까?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죽은 사람이 살아나야 바울이 위로를 받을 텐데 이건 거꾸로 유두고라는 한 청년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삼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으니 얼마나 큰 낭패겠습니까? 그리고 그 청년의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같이 예배를 드렸던 성도들은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청년이 예배 중에 죽었으니 도대체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여, 말씀 좀 해보십시오.” 이 사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행20:10,12)
여러분, 예배 중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 시끄러운 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이 낙심과 비통함 속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청년의 생명을 다시 살려 주시고, 뼈마디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함으로 모든 성도들이 더 큰 위로를 받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어떠한 환난 중에라도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중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히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너무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되,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꿋꿋이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환난 중에 늘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위로하시는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느니라.”(고후7:4-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3-7)
여러분,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로부터 어떠한 위로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혹 이러한 말씀으로 위로 받지 않으셨습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라.”(욥5:18-19)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수고와 고난을 너무나 잘 아시고 있습니다. 이 이민 생활과 유학 생활의 고통도 너무나 잘 아시고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마음의 갈등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며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아멘! 이러한 주님의 위로의 음성이 삶의 현장 속에서 계속 이루어져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마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