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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된 딸을 키우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빠와 엄마가 이런 대화를 합니다. “여보, 딸이 사춘기가 오나 봐요.” “아니 왜? 무슨 일이 있어?” “글쎄, 딸 방에 들어갔더니 딸이 눈물을 흘리고 울지 뭐예요" ”아니, 녀석이 왜 우는 거야? 아빠가 밥을 굶겼어 용돈을 안 줬어?“
”그게 아니고요. 자기가 못생겼다고 비관하여 그러는 것 같아요?“ ”아니, 우리 딸이 뭐가 못생겼어? 그만하면 되었지. 더 잘나면 뭐해?“ ”글쎄, 교회에 성도님들이 우리 딸보고 “너는 얼굴이 참 동그라네!’ 하는 그 말에 쇼크를 받는가 봐요.“ ”아니, 그걸 가지고 뭘 쇼크를 받고 그래. 얼굴이 네모나고 세모진 것보다는 동그란 게 낫지. 참 내 기가 막혀서!“ ”여보, 아무래도 사춘기라서 그러는가 봐요.“ ”아이고 사춘기 두 번 오면 아 죽겠다.“
여러분, 사춘기 때에는 이성보다는 아무래도 감정이 더욱 예민해지고 감정에 많이 좌우가 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많이 판단을 하게 됩니다. 흔히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과 세대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이성과 감정의 차이로 인한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러브스토리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연인들끼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많이 있다 보니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감정은 보는 사람들에게 찐한 감동을 줍니다. 사랑을 하는 그들에게는 신분이나 돈이나 학벌보다는 사랑의 감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앞서는 부모에게는 사랑보다는 학벌이나 집안 배경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서 두 연인은 결국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두 연인은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고, 나중에 그 연인들의 숭고한 사랑에 그 부모도 감동하게 되고, 그러나 그때 주인공 중 하나는 죽고... 뭐 이런 내용이 동서양의 러브스토리입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에서 보면 대개 사랑이란 감정이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욱 아름답게 묘사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타인의 남편이나 타인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간통조차 미화가 되기도 하는 세대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이성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들이 사랑의 감정을 너무 아름답게 묘사하다보니 그런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이전에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바람난 가족’ 같은 것은 아무리 인간들에게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잘못된 사랑의 감정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 절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성이냐 감정이냐?” 이러한 논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이성과 감정, 둘 중에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때나 혹은 청춘의 시절에는 사랑의 감정을 빼고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대개 이성보다는 감정을 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각박한 사회생활을 경험하다보면, 그리고 나이가 먹다 보면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면에 더욱 치중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여성의 경우는 감정이 잘 발달이 되어있고 남성의 경우는 이성적인 판단력이 잘 발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을 움직이려면 감정에 호소하고, 남성을 움직이려면 이성에 호소하라”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과 이성의 비율은 개인의 자라난 환경이나 문화, 혹은 유전적인 면에서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뛰어나고, 연구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력과 감수성이 동시에 뛰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력과 감수성이 동시에 더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감정과 이성이 순간적으로 마비되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서 편견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고운 정 미운 정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성적으로 보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도 예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내 자녀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미운 정이란 공식으로 대입을 하여 “아이고 내 새끼!” 하고 사랑스럽다고 껴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자녀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대입하여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아니 그런 행동을 하는데 부모가 그걸 가만히 나두는 것은 뭐냐?” 하고 질타를 합니다. 즉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편견적인 이성과 편견적인 감정이 좌우를 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자신과 고향이 같거나, 학교가 같거나, 아니면 같이 밥을 먹었거나 할 때 이러한 편견적인 감정과 이성이 많이 작용을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속에는 감정과 이성이 공존을 합니다. 때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러서 우리의 표면에 노출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성이 우리의 감정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란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속박 당하면 심한 스트레스가 쌓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학에 보면 “감정을 무조건 절제시키려고만 하지 말고 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큰 슬픔의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슬픔의 감정을 눈물과 통곡으로 자연스럽게 발산을 시켜야지 그것을 참고만 있으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면에 있어서 하나님도 굉장히 개방적이고 관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왕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될 때 다윗은 너무나 좋은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감정을 신하들 앞에서 표출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심하게 몸을 흔들다보니 그만 바지가 내려와 본의 아니게 신하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분명히 해외토픽 감입니다.
이러한 채신머리없는 다윗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 다윗의 아내 미갈이란 사람이 다윗을 심히 업신여기며 다윗에게 한 마디 쏘아댑니다. “아이고, 당신 참 잘났소! 오늘 보니 당신 춤 솜씨가 상당히 좋군요. 그것도 아랫도리를 벗고 계집종들 앞에서 춤을 추니 참 가관이요!”
이 말에 다윗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춤을 추며 기뻐한 것은 여호와 앞에 한 것이요. 이제까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왕이 되게 하셨으니 내가 기뻐서 뛰노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비록 바지가 내려가 본의 아니게 스트립쇼를 했지만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같이 기뻐하셨을 것이요.”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며 감정 표현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그만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결말은 성경에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6:23) 즉 하나님은 자신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반면 그러한 행동을 천박한 것으로 몰아붙이고 다윗을 조롱한 미갈을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곳 서양 사람들은 감정 표현을 상당히 잘하는 편입니다. 특히 예배시간에도 일어나 기쁘게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 저들은 참 멋있구나! 저렇게 하나님께 춤을 추며 노래하니 참 부럽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 괜히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니, 교회에서 왜 이렇게 경박하게 그래! 여기가 뭐 나이트 클럽인줄 아나?” 하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한 때는 이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아 제법 오랫동안 시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저도 이런 체험을 하다 보니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상당히 개방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교회, 영어로 말하면 펜티코스탈(pentecostal) 교회들은 예배 시에 이러한 감정 표현에 대하여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감정 표현이 오해를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방언도 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이 사람들, 술이 취했구나!” 하고 조롱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 “여보시오. 지금 우리들이 아침부터 술을 먹고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이는 하나님이 말세에 부어주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춤을 추고 방언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감정적인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을 너무나 차갑다고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적인 사람을 너무나 천박하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때로 이성은 감정을 향해 이렇게 자랑합니다. “유치한 감정아, 나는 너와 같지 않단다.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을 한단다. 그리고 나에게는 정확한 판단력이 있단다. 나는 너같이 절대로 어리석지 않단다, 나는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 있단다.”
이러한 이성의 자랑을 듣다보면 이성이 감정보다 훨씬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성만 있고 감정이 없다면 얼마나 메마른 사막과 같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남녀가 사랑을 할 때 사랑의 감정은 배제된 채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너무나 삭막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배우자가 될 사람을 학벌이나 돈이나 가정환경 등 이성적으로만 판단하여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사랑도 할 수 없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계이지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신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학 교수님의 강의는 모든 신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한 신학생을 너무나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 교수인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하나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져보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신학 강의를 듣는 한 신학생은 분명 자기보다 신학지식이 없고, 성경도 자기보다 잘 모르는데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고, 그로 인해 그렇게 행복스러울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즉 신학교 교수에게는 하나님을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 아는 힘이 있었고, 신학생에게는 하나님을 감성적으로 아는 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단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여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 같은 분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이 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만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이란 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이 제대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이 다 같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신앙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 성장된다고 하는 것도 이성만의 성장을 뜻하거나 감성만의 성장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그리고 그러한 감성과 이성이 하나님과 같아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격이 성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지능지수(IQ : Intelligence Quotient)만이 아닌 감성지수(EQ : Emotion Quotient)도 같이 좋아져야 합니다.
감수성은 인생의 모닥불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언 몸을 데워주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성이 너무나 거세게 타올라 손해를 입히는 화재를 일으키게 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철한 지성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자기 절제와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균형과 조화도 요구됩니다. 그래야 슬픔을 녹여 기쁨으로, 기쁨도 슬픔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감수성을 이유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여과 없이 토해내면, 나중에는 자기도 남도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때로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머리로 납득이 안 되는 진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으로도 느끼지 못하는 진리도 또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이성적인 지식도 수반하고, 감성적인 모습도 수반하지만, 때로는 이 둘을 초월하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의 이성이, 그리고 당신의 감성이 이 사실에 동의를 한다면, 다시 말해 당신의 이성과 감정이 믿음이라는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일 수가 있다면, 성경의 진리에 굴복을 할 수가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겸손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과 믿음을 두루 갖춘 좋은 신앙인의 모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감성을 잘 조화시킴으로 좋은 믿음으로 자라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