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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사회를 떠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모이는 사회라는 곳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름답다. 행복이 넘친다. 서로를 돕는 곳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더럽다. 추하다. 썩은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회가 더럽다,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 반사회적인 사람이 되기 쉽고,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특히 언어와 문화와 종족이 다른 외국 땅에 이민이나 유학을 오면 그곳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 이곳 캐나다에 올 때에는 대부분 이곳이 한국보다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다 보면 나름대로 이곳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몇 년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학생의 총기난사 사건을 볼 때 그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곳 밴프 에서도 은행 강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한국인 두 청년 형제였습니다. 부모가 교회에 다니는데 아들들의 구명 운동을 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뛰면서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구명 편지를 써서 재판부에 보내려고 하는데 그 편지 내용을 대충 보니 이민 1.5세나 2세들이 이곳 사회에 적응하기에 힘든 고충에 대해 언급하면서 선처를 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데,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산다는 것이 힘이 들면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천국처럼 사랑과 기쁨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사회는 미움(시기, 탐욕, 권모술수, 사기, 도둑, 강도, 살인)도 있습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는 인종차별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타락한 인간이 모여 있는 사회가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산물입니다. 말세로 갈수록 사회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적응이 더욱 만만하지 않습니다. 고로 이 사회적응이 힘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고립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홀연히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가 되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 신기한 장면을 본 베드로가 말합니다. “예수님, 우리 여기 산에다가 초막 셋을 짓고 행복하게 삽시다. 골치 아픈 마을에는 뭐하려고 내려갑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골치 아픈 산 아래 마을에 내려오셨습니다. 사회적응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에 내려와 보니 왁자지껄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17절) 아니, 예수님 보시기에 그렇게 패역한 세대라면 예수님이 그 마을에 내려오시지 않고 베드로의 말을 듣고 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산신령처럼 사시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오늘의 성경이야기에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도 인간 세계를 볼 때 마음에 안 드는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산으로 들어가야 되느냐? 스스로 고립이 되고, 스스로 왕따가 되고, 스스로 사람을 기피해야 되느냐? 아니면 사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사회를 파괴해야 하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사회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의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내려와 귀신을 쫓아내시고 치료의 사역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적극적으로 사회에 적응을 하고 사회를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나를 가장 위해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같이 교제를 나누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요,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고 타락한 인간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쉬운데, 사람과 같이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어요.” 이해가 됩니다. 사람과 같이 지내다 보면 의견 충돌도 나고, 그 가운데 자존심도 상하고, 때로는 모욕과 수치도 느끼기도 하고, 분노도 생기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하다가 교회에 안 나오고, 때로는 교회를 옮기기도 합니다. 힘든 사람과 같이 있지 말고 피하자는 뜻입니다. 요즈음 세대에 이혼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서로 미워하면서 힘들게 살지 말고 헤어지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럴듯하지만 바람직한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부족한 인간이 서로 공동체를 이루며 지낼 때, 미움을 극복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 안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원수가 먼 데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가까운 사람 즉 가족이 원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인내도 필요하고, 용서도 필요하고, 자비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기에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말씀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물론 어려운 사람과 같이 지낸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자칫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립과 탈피의 방법은 좋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도둑을 피하려다 강도를 만난다. 혹을 떼려다가 도리어 혹 하나 더 붙인다. 종종 이민 사회가 힘이 든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는 그렇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여 이곳 캐나다에 도피성 이민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도 죄인들인 모여 사는 세상입니다. 이곳도 힘듭니다. 고로 그런 분들은 이곳에서도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우수하지만 공동체를 이룰 때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힘, 서로를 생각해주는 힘, 서로를 아껴주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성이 없고, 사회 적응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자칫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더욱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직장인들이 술을 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거룩성은 지키면서도 동시에 사회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안 믿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전도도 합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세상 사람들보다 사회적응 면에 있어서 앞서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바울은 어느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사회 적응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디에다 내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인과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북미인들과도 살 수 있어야 하고, 산 속에 있는 사람과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도시 사람과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농촌 사람과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낮은 데서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높은 데서도 살 수 있어야 하고, 가난에 처해서도 살 수 있어야 하고, 풍부에 처해서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사회 적응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귀신들린 한 아이가 나옵니다. 귀신에 잡혀서 간질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언제 발작을 할 지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기가 겁이 납니다. 집 밖에 나가기도 불안합니다. 이렇게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원인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우울증 환자, 우월주의(최고주의, 공주병, 왕자병) 사상을 가진 자(교만한 자), 타협과 화해를 모르는 독단주의자, 마음에 상처를 너무 쉽게 받는 자, 오해를 잘하는 자, 마음이 꽁한 자(내로우 마인드), 화를 잘 내는 자, 이런 사람들(환자들)은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이 들 겁니다.
고로 이런 분들은 사회(교회)가 같이 보살펴주어야 합니다. 만약 조승희라는 학생을 사회가 보다 잘 보살펴 주었으면 어땠을까요? 특히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는 상당히 중요한 사회입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특히 이성 간에 왕따를 당하면 우울증이 생기고, 나중에는 분노가 일어나고, 그 분노가 폭발하면 이런 사건들이 터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의 희생자는 우리 모두입니다. 즉 사회성이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는 일들을 서로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이곳 캐나다에 이민이나 유학 와서 적응하며 살기도 바쁜데 그렇게 사회적응을 못하는 환자들을 보살펴주기가 벅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이런 환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들을 서로 돌보아야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이 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목사 혼자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목사가 많은 환자를 돌보기 때문에 가장 지치기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선교회(여선교회, 청년유학생회...)가 있습니다. 또래의 이런 사람들을 서로 돌보라는 것입니다. 사회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명을 감당하고, 그들로 사회 적응(교회적응)을 잘하도록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가꾸시는 중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요즘 살기가 힘이 든 분이 있습니까? 혹시 사회적응, 가정 적응, 교회 적응, 학교 적응, 직장 적응이 잘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고 짜증이 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고 지구를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70-80살까지 즉 인간은 죽기까지 사회에 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사회에 적응하고 살려면 힘이 듭니다. 좋은 친구(이웃)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좋은 친구로 오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이 어려운 사회를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시다. “주여, 주님이 만드신 이 사회(교회, 가정, 직장, 학교)에서 잘 적응하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