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날짜: 
2024/07/20
말씀: 
시19:12-13
말씀구절: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설교: 

성경에 보면 “아- 이건 또 왜 그러지?” 하고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고후11:24) 여러분, 40에 하나를 빼면 39입니다. 왜 유대인은 40대를 때리지 않고 39대를 때릴까요? 이에 대한 대답의 힌트가 신명기 25:1-3에 나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이 구절에 보면 40대까지는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40대 넘게 때리면 그건 너무했다. 그건 인권유린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때리는 사람이 40대를 신나게 때리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한 대씩 더 때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도리어 때리는 자가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때릴 때 아예 처음부터 39대만 때리는 겁니다. 어때요? 이해가 좀 되시겠지요.

그런데 그건 있습니다. 때리는 자가 아주 힘을 주어 세게 39대를 때리는 것과, 마사지하듯이 살살 39대를 때리는 경우는 효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즉 어떤 사람은 세게 때리고, 어떤 사람은 약하게 때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러지요? 이 사람은 내 편이니까 살살 때리고,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니까 세게 때리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뇌물을 바치면 살살 때리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세게 때리고... 이것도 안 되겠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동해복수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 즉 너가 해를 당했으면 똑같은 해로 보복을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주먹으로 한대 맞아서 이빨이 하나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이빨을 한개 부러트려야지, 아예 옥수수 털듯이 이빨을 모두 빼버리면 그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빨이 하나 부러졌는데 상대방의 눈을 하나 빼버리면 안 됩니다. 아니, 어떻게 이빨 하나하고 눈 하나하고 같겠습니까? 그건 너무나 지나친 보복행위입니다.

고로 ‘동해보복법’은 지나친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진행할 때 개인이 하지 못하고 반드시 재판관이 집행하도록 합니다. 왜 그러지요? 그건 죄에 대한 형벌을 정할 때 공정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런 ‘동해보복법’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어때요? 동해보복법 같은 구약의 율법이 좋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약의 사랑의 법이 더 좋습니까? 물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법이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건 있습니다.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흉악범이 아주 큰 죄를 지었는데, 그 죄에 대해 너무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도리어 “어-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랑의 법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 죄에 대하여 무조건 무죄 판결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성경의 보충설명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19-20)

즉 우리가 직접 보복을 하지 말고 우리는 끝까지 사랑을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공의롭게 내 대신 보복해 줄 사람 보복해주시고, 교통정리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처리하시는 것이 인간의 보기에 좀 더딜 수 있고,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보고,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겁니다. 제가 종종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세요.” 그럴 때 하나님도 종종 저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아, 너도 입장 좀 바꿔 놓고 생각해봐라. 너도 내 입장이 되어봐라.“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그러니까 ‘내로남불’을 입장을 바꿔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로남불’을 거꾸로 하면 ‘내불남로’ 즉 ‘내가 하면 불륜이고, 남이 하면 로맨스‘입니다.

다시 말해 그건 너의 탓, 너의 잘못이 아니고, 내 탓이고 내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 좋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 건 너의 죄보다 내 죄가 더 크다는 겁니다. 아- 이거 제대로 은혜 받은 분들의 올바른 생각입니다. 남의 죄를 들추고 비난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먼저 깨닫고, 자신이 먼저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좋습니다.

오래 전에 뉴스를 보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캘거리 시가 세계에서 산책로가 가장 많이 있는 도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산책을 즐겨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겁니다. 산책로가 많던지 적던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 역시 그전에 그랬습니다. “아- 외국 땅에서 먹고 살기도 힘들고, 목회하기도 바쁜데 무슨 한가롭게 산책이냐?”

그런데 몇 년 전, 저의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오고 난 때부터 매일 산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아지 키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강아지의 최우선순위는 산책입니다. 강아지는 자다가도 ‘산책가자.’ 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특히 저의 집 강아지는 비숑과 푸들 믹스견 수컷입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아도 에너지가 넘치는 녀석입니다. 하루라도 산책을 안 가면 우울해합니다. 반면 산책을 하면 너무나 행복해합니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너의 모습을 보고 나도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강아지와 함께 매일 여기저기 산책을 하다가 종종 발견하는 팻말이 있습니다. ‘Private Property'(개인소유지)라는 사인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런 말도 적혀있습니다. ‘No Trespass'(침입금지) 그리고 어떤 때는 이런 사인이 있습니다. "Violators will be prosecuted."(무단 침입자는 형사 처벌됩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캐나다에서는 아직 못 봤는데 미국에는 이런 팻말도 있다고 합니다. “All violators will be shot.”(모든 침입자는 총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때로는 이런 말도 적혀 있다고 합니다. “Survivors will be shot again.”(첫 번째 총격에 살아남은 자는 다시 총에 맞아 죽을 것이다.) 아- 이거 완전히 살벌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92년 10월 17일에 미국에 유학 온 일본 학생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친구의 집에 초대 받은 일본 학생이 그만 집을 제대로 찾지 못해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이 외쳤습니다. ‘Freeze'(꼼짝 마라)

그런데 일본 학생이 ‘Freeze'(꼼짝 마라) 이 말을 ’Please'(제발)로 잘못 이해하고 계속 움직이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겁니다. 쌍방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수로 일어난 비극입니다. 이런 경우 성경의 언어로 ‘허물’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어로 ‘파라프로토마’입니다. 이 뜻은 ‘길에서 벗어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fault'입니다. 테니스 경기에서 서비스한 공이 선을 벗어나면 이를 ’fault' 라고 합니다.

이때 이를 가리켜 ‘sin'(죄)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죄’라는 것은 원어로 ‘하말티아’라고 합니다. 이 뜻은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라는 의미입니다, ‘허물’이 알지 못하고 짓는 실수와 같은 가벼운 죄라면, ‘죄’라는 단어는 허물에 비해 좀 더 의도성이 있는 무거운 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설교 제목처럼 알고도 짓는 죄는 ‘하말티아(sin)' 즉 무거운 죄이고, 모르고 짓는 죄는 ’파라프로토마(fault)‘, 좀 가벼운 허물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의도성에 따라서 중죄가 되기도 하고, 경죄가 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군중들을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즉 모르고 저지르는 죄는 용서함을 받기 쉽지만, 알고도 저지르는 죄는 용서받기가 좀 더 어렵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예수님의 친동생인 사도 야고보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니라.”(약4:17) 즉 안다고 하는 사람이 죄를 짓거나 선을 행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형벌이 더 무거울 수 있다는 겁니다.

같은 죄라도 성인이 짓는 죄는 더욱 무겁게 처벌이 되고, 청소년이나 미성년자가 짓는 죄는 똑같은 죄라도 좀 더 약하게 처벌이 됩니다. 그리고 장애자나 정신병 같은 병력이 있는 사람이 짓는 죄는 거의 무죄가 되기도 합니다. 왜 그러지요? 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신체적 시스템이 고장 났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해주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거짓말 탐지기’를 해보신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가끔 TV에 보면 연예인들이 재미로 거짓말 탐지기를 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의 원리는 인간의 자율신경계를 이용하는 겁니다. 즉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면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맥박이 빨라지고, 땀이 나기도 합니다.

현재 과학수사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거짓말 탐지기의 정확도는 97%에 육박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3%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3%에 해당되는 경우 중에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사람이 이에 해당됩니다. ‘리플리’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자기 자신도 그것이 거짓말인 것을 모르고, 사실로 착각하는 병입니다.

이를 의학적인 용어로 ‘공상 허언증’이라고도 합니다. 즉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거짓말 탐지기로도 잡히지 않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이나 인식이 전혀 없기에 자율신경계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남이 모르게 뒤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뒷담화를 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런 리플리 증후군, 공상 허언증 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양심이 무뎌지거나, 양심이 죽어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잘난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놓고, 스데반 집사를 죽여 놓고, 선지자들을 죽여 놓고, 의인을 수없이 많이 죽여 놓고, 자신은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회개가 안 됩니다. 이렇게 회개를 안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심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하므로 회개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사단이나 귀신들이 왜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줄 아십니까? 다름 아닌 그들은 회개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사단이나 귀신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즉 회개를 못하는 사람은 사단이나 귀신들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아주 버림을 당할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허물과 죄를 범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마다 즉각 즉각 회개합니다. 고로 우리는 용서함을 받고, 불쌍히 여김을 받고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에 다윗은 기도 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12-13)

다윗이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미리부터 기도를 하니까 그는 나중에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므로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신하 한명을 죽이고, 과부가 된 신하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당시에 그리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의 그러한 못된 죄를 책망하시고 다윗의 죄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다윗왕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다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그렇게 책망해도 그 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도 제대로 못하므로 결국 기회를 잃어버리고 비극의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형벌이요 저주요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님이 나의 죄, 너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와 심판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거룩한 성도라고 하지만 여전히 알고도 모르고도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순간 순간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또 다시 회개를 하므로 계속 용서함을 받습니다. 아무쪼록 겸손한 마음으로 늘 회개하므로 새로운 기회도 얻으시고, 장래와 미래가 더욱 소망과 행복이 깃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알고도 모르고도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 이웃들의 마음을 많이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고, 아프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시고, 숨은 허물에서도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