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오늘의 본문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4:2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푸신 것이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한 사람도 세례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2 제자를 비롯해 수제자인 베드로에게도 세례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순복음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성령세례’를 매우 강조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자격에도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집사가 되는 자격도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기 전과 성령세례를 받은 후의 신앙생활이 180도 혹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겁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노년에 가장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보다 잘 믿게 해주세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당시 영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최고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원근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영적 자존심이 대단히 센 바리새인들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찾아왔고, 제사장들과 권력자들인 사두개인들까지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분봉왕 헤롯 안디바도 세례 요한이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책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인으로 여기며, 그를 보호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자 세례 요한의 인기가 갑자기 식어졌습니다. 세례 요한한테 가는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서 모두 예수님에게로 가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자기가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후배입니다. 나이도 세례 요한이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6촌지간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6촌 형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같은 업종에서 자기보다 늦게 출발했고, 그 사업에서는 세례 요한이 원조입니다. 그런데 어라-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잘되니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모두 자기의 손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르르- 옆에 가게로 가는 겁니다. 이때 솔직히 말해서 세례 요한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습니까? 선지자의 체면이 있어서 말은 안 해도 거기서 오는 허탈감, 상실감, 패배감, 무기력함, 시기와 질투 등등 복잡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가 유대인과 결례에 대하여 변론을 했다고 합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결례의식 즉 정결예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세례를 받아야 더 효과가 있을까요? 아마 그들이 서로 변론을 하면서 이런 말도 오갔을 겁니다.
“야- 너희 스승인 세례 요한보다 저기 예수라는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거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니 예수라는 분이 너희 스승보다 훨씬 뛰어난 분인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가서 한탄조로 이야기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가더이다.” “엥- 우리는 망했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때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어우- 그래? 야- 애들 다 불러 모아. 연장들 챙기고, 오늘부터 저들과 전쟁이다.“ 하고 조폭처럼 행동했습니까?
No.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리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8-29) 즉 예수님이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 중에 신랑의 친구이며 신랑의 들러리를 가리켜 ‘쇼쉬벤(shoshiben)'이라고 합니다. 쇼쉬벤은 신랑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합니다. 특히 신랑이 오기까지 신부의 방 앞에서 신부가 아무 탈 없이 안전하도록 지키다가, 신랑이 오면 기쁘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역할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이런 ‘쇼쉬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런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여러분, 이 말은 보통 사람들이 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을 거꾸로 합니다. “그는 망해야 하겠고, 나는 흥해야 하리라.” “그는 빨리 죽어야 하겠고, 나는 오래 살아야 하리라.” “그는 가난해야 하겠고,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는 작아져야 하겠고, 나는 커져야 하리라.” “그는 낮아져야 하겠고, 나는 높아져야 하리라.” “그는 꼴등이 되어야 하겠고, 나는 일등이 되어야 하리라.” “그는 못나야 되겠고, 나는 잘나야 되리라.” 이런 시기와 질투심은 특히 멀리 떨어진 사람보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 감정이 예민하게 작동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누구나 이런 시기와 질투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가 남들보다 적은 사람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남들보다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시기와 질투가 너무 많아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아주 피곤하게 하고, 그 그룹의 사람들을 아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기와 질투가 거의 정신병 수준인 경우도 있고, 이것이 더욱 심하면 시기와 질투가 귀신의 힘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인간의 힘과, 인간의 말과, 인간의 노력으로 그 사람을 못 말립니다. 아니- 귀신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인간이 어떻게 제어합니까?
만약 그런 사람 주위에 경쟁 상대가 나타나서 그를 신경 쓰이게 하거나, 그 사람의 인기나 명예를 뺏어 가면 그 경쟁 상대는 그 사람으로부터 갖은 모함과 참소와 이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을 몰고 다니자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잡아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며 군중들을 선동해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고 가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모함했습니다. 즉 그들의 시기와 질투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원수가 되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패싸움을 해서 난리가 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 저것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만날 싸움질만 한다.”고 욕을 얻어먹었을 겁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기는 망해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인격이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너도 흥해야 하고, 나도 흥해야 한다. 우리 서로 윈윈하자.”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너는 기필코 흥하고, 나는 반드시 망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한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마11:11)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비결을 가르쳐 드릴게요. 아- 세례 요한처럼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면 됩니다. 같이 따라해 보세요.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어때요? 진짜 이 고백대로 되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속으로는 “에이, 내가 예수님을 왜 믿는데...? 예수님 믿고 내가 잘되려고 믿는 거지, 내가 망하려고 믿는 것은 솔직히 아니잖아.”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아- 이 생각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고, 내가 망해야 예수님이 흥하고, 내가 작아져야 예수님이 커지고, 내가 낮아져야 예수님이 높아지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분들은 “아- 예수를 위해 내가 망하고, 예수를 위해 내가 고생하고, 예수를 위해 내가 죽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아- 이 생각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진리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이 질문에 “아- 당연히 예수님이 높아져야 하고, 나는 낮아져야 하지요.”라고 대답을 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높아져야 할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 높고 높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미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낮고 천한 이 땅에서 꿈틀꿈틀 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예수님을 굳이 비교하면 나는 낮고 천하며, 예수님은 이미 높고 귀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흥하셨고, 나는 앞으로 병들어 죽을 운명에 놓였으니 예수님에 비하면 아주 망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너와 내가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백 번을 말하고, 천 번을 말해도 현실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조금도 손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야- 너 믿음 되게 좋구나!” 하고 칭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대를 바꾸어 내가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예수님과 같이 있었다고 하고, 내가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진짜 망해야 예수님이 흥하는 겁니다. 내가 진짜 죽어야 예수님이 사시는 겁니다. 이때는 반드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고백대로 그 후에 그렇게 찌그러졌습니다. 쇠하고 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이없게도 목이 잘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사건은 2000년이란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저와 여러분도 오늘날 똑같이 직면하는 상황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의 분신이요 자신의 몸인 교회를 남겨놓았습니다. 즉 교회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때 교회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자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26:14) 즉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못살게 구는 행동입니다.
반면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세우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너희를 박대하는 것은 나를 박대하는 것이라.”(미10:40)고 했습니다. 또한 믿는 자 중에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컵을 대접하면 그 행동을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으로 여기고 반드시 그의 행동을 상급으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마10:42)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누가 파괴하고, 누가 교인들을 괴롭힙니까? 물론 외부의 불신의 세력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항상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즉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알게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고도 정작 본인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자기의 죄를 잘 깨닫지도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눈에 잘 나타나지 않고, 그리 큰 죄라고 생각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누가 나보다 잘되면 시기하고, 누가 나보다 높아지면 질투하는 마음입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님들은 구변과 지식과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쟁이 있었습니다. 같은 교인들끼리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네 패로 나누어져서 서로가 잘 났다고, 서로가 높아지려고 하다보니까 감정이 안 좋아지고, 교회 분위기가 안 좋아졌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성도 간에 시기질투하고 미움의 감정이 생기면, 그것이 알게 모르게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못살게 구는 겁니다. 고로 저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시기질투는 금물입니다. 그로 인한 미움의 감정이 생기면 안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예수님이 삽니다.
혹 믿는 분들 중에 아직 진리가 덜 들어가서 “에이- 교회는 망해도 나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뭐- 교회가 여기 밖에 없냐? 일단 내가 높아지고, 내가 흥하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결국 “예수님은 망해야 하겠고, 나는 흥해야 하리라.”라고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그건 신앙생활을 거꾸로 하는 겁니다.
물론 말세는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하는 극한 이기주의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이 흥해야 합니다. 그 분의 몸인 교회가 반드시 잘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 옆에 있는 교우 한 분 한 분이 잘돼야 합니다.
때로는 그가 나보다 훨씬 잘돼야 합니다. 때로는 나를 희생시키더라도 믿음이 약한 그 분을 챙겨주고, 그 분을 세워줘야 합니다. 때로는 그가 흥하고, 내가 조용히 찌그러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면, 결국 그 분에게 붙어있는 가지인 나와 너도 다 함께 잘되고 다함께 흥하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흥하고, 나는 쇠해도 괜찮다는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광을 누리며 예수님과 같이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 같이 눈물로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며, 희생의 자리에도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이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오셨습니다.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당신의 몸인 교회를 세워놓았으니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축복을 넉넉히 얻게 하시옵소서. 이 외국 땅에서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급도 많이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