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정 미운 정

날짜: 
2005/01/16
설교: 

마6:43-48 고운 정 미운 정
여러분, 미운 정은 미움일까요 사랑일까요? 이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14%가 "미운 정은 미움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운 정은 사랑이다"라고 대답한 분들은 85%나 되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면서도 때때로 미움을 느끼고, 반면에 미워하면서도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움 속에서도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정이 생길 수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미운 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을85%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아니, 고운 정은 알겠는데 도대체 미운 정이라는 것이 뭐야?" 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까요? "응, 고운 정은 단순하게 좋은 감정이고, 미운 정은 좀 복잡하게 좋은 감정이야."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고운 정은 형이하학적인 감정이고, 미운 정은 형이상학적인 감정이야."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정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 청소년 시절에는 고운 정을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겠지요. 그러다가 점차 나이가 먹어 가정도 이루고 오랜 부부 생활과 자녀들을 키우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미운 정이란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미운 정이라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사는 분들도 있겠지요. 더구나 싫은 것은 싫고, 좋은 것은 좋다 하는 식의 단순한 젊은 세대에게는 미운 정이란 것은 잘 이해가 안되고, 또 그러한 미운 정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젊은 분들에게 이런 설문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결혼은 누구와 하는 걸까요?" 이에 대하여 "결혼은 미운 정이 든 사람하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분들이 16%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은 고운 정이 든 사람하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분들이 83%가 되었습니다. 즉 미운 정은 사랑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선뜻 미운 사람을 상대로 사랑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답을 굉장히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우리 집사람과 결혼을 할 때에 우리 집사람이 예쁘고 아름답고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결혼을 했지, 우리 집사람이 추하고 못되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집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이 험난한 세상에 고운 정이 든 사람과 함께 평생을 살아야죠, 살기도 힘든데 미운 정 같고 어떻게 살겠어요?
그런데... 결혼을 해서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물론 몇 년 동안은 계속 깨가 쏟아져서 쳐다보기만 해도 "아이러브유. 유러브미?" 하고 고운 정만 생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좀더 인생을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맨날 "아이러브유. 유러브미?" 하고만 삽니까? 때로는 다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다툴 때에는 미운 감정이 솟아오르다가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가다 보면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왜 웃는 거지요? 겉으로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이구, 이 웬수야!" 그런데 속으로는 그렇게 원수라고 말을 하지만 진짜 그것이 원수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원수처럼 미워했지만, 지금은 미운 정이라는 것이 붙어서 예쁘게 보아준다는 뜻이 아닙니까?
좀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끔 부모님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아이고, 이 똥 강아지 같은 녀석!" 여러분, 이 말의 뜻은 내 자녀가 맨날 똥만 싸고 못됐으니까 그 자녀를 갖다 버려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 뜻이 아니라 비록 이렇게 똥만 싸고 귀찮게 해도 사랑스럽다는 뜻이 아닙니까? 즉 자기 자녀가 못된 짓, 미운 짓을 해도 그것을 통하여 정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이 아닙니까?
물론 이런 미운 정을 내 자녀가 아닌 다른 자녀에게도 느끼고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아기에게 "아이고, 이 똥 강아지 같은 녀석!"이라고 말을 한다면 상대방 부모는 "아니, 내 예쁜 자녀를 왜 똥 강아지라고 하는 거야?" 하고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부모란 자신의 자녀에게는 미운 정을 쉽게 느끼지만 남의 자녀에게는 미운 정이 쉽게 가지 않습니다. 즉 내 자녀가 미운 짓을 하면 그 미운 짓도 예쁘게 보지만, 남의 자녀가 미운 짓을 하면 단순히 그것을 밉게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떨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죠. 만약 내 자녀뿐 아니라 다른 자녀에게도 똑같이 미운 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자에 가깝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더구나 다른 아이가 내 자녀를 때리거나 못살게 해서 내 자녀가 울거나 할 때에도 상대방 자녀에 대하여 미운 정, 즉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면 그 분은 성자일 것입니다.
물론 제 삼자는 그런 아이에 대하여 미운 정을 보다 빨리 느낄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끔 우리 교회 어린이들을 봅니다. 한 어린이가 다른 어린이를 때리거나 못살게 굴면, 혹은 심하게 울거나, 아주 아동틱하고 저질스런 행동과 말을 하면 "애, 그러지 말어!" 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속으로는 "햐, 고것 참 싸움 잘하네! 햐, 고것 참 잘 우네! 햐, 고것 참!" 하면서 미운 정, 즉 사랑이 생기게 됩니다.
특히 우리 교회 주일 학교 어린이들은 부수고 깨트리고 망가트리는 데에는 굉장한 은사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물이 그렇게 망가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것을 보면 당장 화가 나기도 합니다. "아니,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저러느냐?" 하고 부모를 탓해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 어린이들을 제가 미워만 할까요?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느껴보셨지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햐, 고 녀석들! 진짜 되게 잘 부수네! 야, 애들아, 고만 좀 부셔라!" 이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고 맙니다. 때로는 "아이고 속 터져!" 하면서 눈을 흘기기도 하지만 조금 있다가 화가 가라앉고 다시 그 아이를 보면 역시 피식 웃고 맙니다. 그 아이에 대하여 미운 정이 들고 있는 과정이 아닙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에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처음 발령을 받아 성인 교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총각 전도사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구에 굉장히 무섭고 영향력 있는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연말에 자신이 맡은 조장님 직분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을 조장님 후계자를 저에게 추천을 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추천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결정을 내렸으니 저보고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그 명령을 저버리면 저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추천한 분이 마음에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분이 그 자리를 맡는 것이 교구 발전에 훨씬 좋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교구가 한번 뒤집어질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습니다. 저의 계획을 다른 권사님들에게 슬쩍 언급을 했더니 수긍을 하면서도 "전도사님, 뜻은 알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전도사님이 위험할 텐데요. 전도사님, 몸조심하세요." 하고 저를 염려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말 발표에 제가 그 권사님이 추천한 분을 빼고 제가 생각한 분을 조장님으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제가 교구 사무실에 있을 때 그 권사님으로부터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예, 김원효 전도십니다." 그러자 그 권사님이 전화에다 뭐라고 하시는지 내용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야, 너 왜 그랬어? 너 나 죽는 것 보려고 그래? 아이고, 나 죽네! 나 죽네!"
여러분, 그 후에 저와 그 권사님이 만나면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분들조차도 그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몇 개월의 세월이 지나고 그 권사님이 추천하고 구상한 것들보다 제가 임명하고 추진한 것들이 훨씬 좋게 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다행이죠. 그러나 그 권사님은 여전히 저에게는 도끼눈을 하고 쳐다봅니다. 때로는 웃음을 짓지만 그 웃음은 "너 임마, 잘돼나 보자!" 하는 섬짓한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가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 저와 그 권사님은 같은 교구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밥도 같이 먹어야 했고, 기도도 같이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장례와 결혼을 비롯해, 이런 일 저런 일 인생을 살면서 되어지는 일들을 같이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권사님을 비롯해 교구의 다른 권사님들과 같이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그 권사님이 저를 뚫어지게 보더니 피식 웃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그 권사님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권사님들도 우리가 피식 웃는 것을 보고 같이 깔깔대고 웃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그 피식 웃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미운 정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지난 번 제가 한국에 갔을 때에도 그 교구 식구들을 만나니 그 권사님이 저를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역시 피식 웃었습니다. 다른 권사님들은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피식 웃으면서 서로를 아끼는 마음, 즉 미운 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자리에 저를 보고 그렇게 피식 웃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미운 정이 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볼 때 자주 피식 웃곤 합니다. 여러분들을 멸시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미운 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웃는 겁니다. 이렇게 들은 미운 정은 굉장한 단결력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가족같이 포근한 마음을 같게 합니다.
여러분,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고 말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입니다. 우리에게는 고운 정 뿐만 아니라 미운 정이 더해져야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고로 결혼식 때 주례는 신랑신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 불고 폭풍이 몰아쳐도 신랑 000을 늘 사랑하기로 서약하십니까?"
여러분, 이 서약에 이 세상의 모든 신랑 신부들이 확실하게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러나 같이 살다보면 서약대로 진짜 그렇게 늘 사랑만 하고 삽니까?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위기가 닥치기도 하고, 미운 감정도 생기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미운 감정이 생겼으니 그냥 이혼하고 맙니까? "사랑 없는 결혼생활은 더 이상 못하겠어요." 하고 각자 헤어지고 맙니까? 아니면 그 미움을 미운 정과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아갑니까?
물론 미움을 미운 정으로 승화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운 정은 상처와 고통을 전제로 하고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마음의 상처를 받아 속이 끓고, 속이 썩고, 속이 상해 죽겠을 바로 그때, 누군가 한 쪽이 중심을 잡고 조금 더 참아내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때 미운 정이 생겨납니다. 어찌 보면 사람 사이의 상처는 미운 정을 북돋우고 사랑을 키워내는 좋은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가 신랑 신부의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어디 고운 정만 가지고 맺어졌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고운 정만 가지고 사랑했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당신 보시기에 고운 모습이 많으니까 나를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애야,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네가 곱고 아름답고 깨끗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
는 내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는 구절 속에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그 의미를 아느냐? 이 세상이 너무나 고와서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줄 아느냐? 비록 세상이 밉고 추해도 내가 너를 사랑했지 않았느냐? 나는 너의 고운 모습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운 모습을 보고도 사랑한 것이란다."
여러분, 인간의 눈은 누구나 고운 모습을 보면 사랑을 합니다. 꽃도 고와야 사랑하고, 사람도 고와야 사랑하고, 어떤 물건도 고와야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추하고 미운 모습을 보시고도 이처럼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미운 것을 사랑하는 것,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원수를 사랑하고, 누가 미운 것을 좋아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미운 것을 정과 사랑으로 승화시키십니다. 성령은 내가 극히 미워하는 원수조차도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오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잠재된 힘을 썩히지 말고 활용하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의 이러한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운 것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고운 것만 바라보고 이리저리 좇아 다니는 철부지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미운 것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것도 우리에게는 가능합니다. 2000년 전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 분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못났다고, 추하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더 이상 배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숨을 쉬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기에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