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확증된 사랑으로

날짜: 
2007/11/13
설교: 

롬5:8 그 확증된 사랑으로
한 잡지에 네덜란드의 ‘엘리나’라는 78세 된 할머니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 할머니의 평생의 소원은 담배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50년 동안 담배를 끊기 위해 클리닉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면서 세월을 보내다 보니 할머니는 어느덧 78세의 노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나’ 할머니가 자기보다 한 살이 더 많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뒤늦게 사랑에 빠져, 서로 떨어지면 안 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이슨’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단 한 가지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름 아닌 당신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제가 담배를 끊지요.”라고 말하더니, 놀랍게도 그 날부터 담배를 끊었습니다. 50년 동안 이루지 못한 평생소원이 단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의 마지막 줄에는 다음과 같은 할머니의 멋진 고백이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우리의 의지보다 강합니다. 사랑에는 환경을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 주위에서 종종 보았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물건도 끙끙거리며 들지 못하던 아가씨가 결혼을 한 후에는 7~8Kg이 훨씬 넘는 바위덩어리 같은 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하루 종일 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이 별별 노력을 다해도 변하지 않던 학생이 믿음이 좋은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 후에는 단정한 옷을 입고 꽁지머리를 깎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착한 학생으로 변화된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저녁잠이 많아 저녁식사만 하고 나면 졸던 여자가 결혼을 한 후에는 병이 들어 고통을 하는 자녀를 밤새도록 돌보아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변할까요? 다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남자 친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50년 동안 끊지 못하던 담배도 끊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사랑의 힘은 우리를 지탱해줍니다. 사랑은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힘을 공급해줍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헬'은 ‘숨 쉰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죽은 가정이고, 사랑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고, 사랑이 없는 인간세계는 죽은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세기 종교 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사랑 없는 인생은 죽은 것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글래드스턴도 "재물이나 지위도 사랑에 비하면 쓰레기와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물론 세상의 인기나 명예, 지위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 등이 강하기는 하지만, 사랑만큼 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사랑도 사실은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친구간의 사랑을 헬라어(그리스말)로 ‘필레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필레오’도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돈 앞에서 친구간의 사랑이 깨어진 채 평생 동안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에로스’도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성 간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헤어지면 후회와 상처만 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의 사랑을 ‘스톨게’의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랑도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이혼한 후에 서로 자녀를 맡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녀가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의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헬라어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아가페’의 사랑이야말로 참 사랑이요,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세상의 시시한 사랑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출근할 때나 학교에 갈 때마다 볼에 키스를 하고 전화를 끊을 때마다, ”I Love You“ 라고 사랑을 고백하는 말을 하지만, 이혼율은 40%를 훨씬 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 달리,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어디에 내어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모진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에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 속에 박혀 살을 찢고 뼈를 상하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채찍을 수없이 맞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2미터 길이의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사형 장소까지 이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셨는데, 그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캔버스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하워드 네츠키 교수’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몸의 체중이 두 손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많은 피를 쏟으며 통증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늘어져 팽창하므로, 호흡장애를 일으켜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근육이 움직여져야 숨을 쉬는데 매달려 있으니까, 숨을 쉴 수가 없고 산소가 부족하니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이 증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면 이 때마다 체중이 발등에 꽂힌 못에 실리므로, 그 고통은 더 가중됩니다. 그러니 그대로 매달려 있자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손은 찢어지고 근육이 당겨져서 숨을 쉴 수가 없고, 숨을 쉬기 위해 발을 치켜 올리면 못 박힌 발에 느껴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극심한 고통을 6시간 동안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목걸이나 귀고리를 해서 차고 다닙니다. 하지만 본래 이 십자가는 그런 아름다운 장식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가장 무서운 사형 틀입니다. 저주스럽고 흉악한 사형 틀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렸고 사정없이 찌르는 가시관을 머리에 쓰셨고, 부끄러운 곳을 가릴 속옷까지 모두 빼앗기신 채 말로 할 수 없는 창피와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요? 여러분과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못 박은 것은 빌라도나 로마군사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범인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마을에 가면 ‘양의 교회’라고 불리는 한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보통 교회들은 지붕위에 있는 탑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는데, 이 ‘양의 교회’의 탑 꼭대기에는 십자가 대신 양의 모양을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양의 조형물이 교회 첨탑 꼭대기에 세워지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그 이유를 알려준다고 합니다.
처음 이 교회가 지어질 때 한 일꾼이 가장 높은 첨탑위에 올라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너무 높고 가파르며 미끄러워, 까딱 잘못하면 떨어져 죽을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꾼은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어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명을 질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장사꾼이 양을 팔기 위해 여러 마리의 양을 끌고 그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일꾼이 떨어졌을 때, 죽은 것은 일꾼이 아니라 한 마리의 예쁘고 살진 양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양의 등 위에로 떨어졌기 때문에, 양은 죽었지만 일꾼은 살았습니다. 그 양은 비록 자기가 원하여 죽은 것은 아니지만, 일꾼의 생명을 구해주기 위하여 대신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감격스런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 양의 조형물을 만들어 교회의 첨탑 꼭대기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노르웨이에 있는 양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 ‘양의 교회’의 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한 마리의 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양은 우연히 교회 밑을 지나가다 한 사람의 일꾼을 살린 양과 달리,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죄에서,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그 양이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는 벌을 받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 예수님께 덮어씌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귀한 독생자이신 예수님까지도 내어주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구체적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면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세상’이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나, 사기꾼이나 살인자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나, 키 작은 사람이나 키 큰 사람이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이나 하얀 사람이나 노란 사람이나, 의사나 노동자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거미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아침 이슬이 내리는 곳에 칩니다. 그것은 그 동안 묻었던
먼지가 아침 이슬로 씻겨 지고, 말랐던 끈끈이가 다시 살아나게 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침 이슬이 내리는 곳에 거미줄을 친 거미는 하루 종일 숨어서 지킵니다. 어떤 때는 3일 넘게 끈기 있게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먹이가 걸리면 쏜살같이 달려들어 잔인하게 공격하여, 거미줄에 걸린 그 먹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거미는 상상외로 잔인하지만, 자기 새끼에게는 매우 다르다고 합니다. 거미는 거미줄 근처에 새끼를 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미의 새끼집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거미는 자기 새끼를 자기 목 근처에다가 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미가 어디로 옮겨 다니든지 목말을 태우고 다닙니다. 그리고 거미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다른 곤충들을 잡아 먹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미 새끼들은 죽지 않고 삽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놀랍게도 거미 새끼들은 어미의 목에 붙어서, 어미의 목덜미를 파먹고 삽니다. 먹이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잔인하고 끈질긴 어미 거미지만, 자기 새끼에게는 자기의 몸을 희생하며 기릅니다. 그렇게 몇 마리의 새끼를 기르다보면, 어느새 어미의 몸은 껍질만 남아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어미 거미를 보고도 새끼 거미들은 슬퍼하거나 고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분별없는 새끼를 위해서 어미는 희생하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미물인 거미와 비교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사랑만큼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어미 거미가 새끼 거미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별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불순종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절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마치 맛있는 떡을 앞에 놓고도 입을 벌려 먹지 않으면 떡이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외국 땅에서 우리는 사랑의 힘이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이란 단어를 나에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놀라운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천국까지 친절히 안내해줍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그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외국 땅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확증된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