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상황을 기억하면서

날짜: 
2004/03/22
설교: 

고후8:1-7 극한 상황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혹시 극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 남성들의 경우에는 대개 군대시절에 그러한 극한 상황에 한번쯤 접해본 경험이 있을 법도 합니다. 특히 100km 행군을 할 때 보면 인간의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도 24시간 동안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니 참으로 어려운 훈련입니다.
이러한 행군을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낙오하면 부대에 돌아가서 상관에게 얼마나 호되게 기합을 받는 지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동료나 부하에게 굉장히 수치스러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낙오자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군을 해보지 않은 분들은 "아니 걷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우냐 ?" 하고 반문하실 지 모르나 이 훈련을 한번쯤 해보신 분들은 100km 행군 소리만 들어도 "어이구, 죽었구나 !" 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걷다보면 발에 큰 물집이 생기는 것은 기본이요, 살이 까지고, 피가 나고, 불이 납니다.
저의 경우에도 이러한 행군을 하다가 발이 굉장히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 발에 땀이 많이 나는 편이라 "땀이 좀 많이 난 것이겠지 !"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100km 행군을 마치고 막사에 돌아와 군화를 벗어보니 온통 발이 까지고 피가 나와 군화 안이 흥건히 피로 젖고 양말과 피와 살이 뒤엉켜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러한 훈련뿐만 아니라 군대의 훈련 중에는 인간의 극한 상황에 도달하게 만드는 훈련이 있습니다. 그 중 유격 훈련이나 공수 훈련도 그런 경우에 듭니다. 저의 경우 군대에서 유격 대장도 하다보니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한 병사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극한 상황에 처해 본 것이 인생을 살면서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에이, 옛날에 그런 극한 상황도 겪었는데 이런 것쯤이야 !" 하고 고난에 쉽게 좌절하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도 힘든 때가 올 때에도 "옛날에 당한 것에 비하면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 !" 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저는 예수님이 당하신 그 극한 고난을 생각해 봅니다. 며칠 전 'The passion of the Christ(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장면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이 너무도 처참하여 제대로 눈을 뜨고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에 비하면 지금 내가 당하는 문제, 내가 겪는 고통, 나에게 임한 고난은 어찌 보면 쇠발의 피가 아니겠습니까 ? 그 극한 고난을 인내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나도 고통 중에 인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예수님의 그 큰 고난을 생각하면 "지금 나의 이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 하고 오히려 감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고생을 모르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금방 낙심하고, 불평하고, 포기하며, 스스로 인생의 불행 속에 더욱 깊게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의 고생을 한 사람들은 웬만한 시련이 와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뿐만 아니라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한국 분들은 식사시 대부분 밥공기에 밥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한국의 어려운 시절이 생각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쌀이 없어 제대로 쌀밥을 먹지 못하고 수제비나 기타 다른 음식으로 식사를 한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처럼 밥이 없으면 라면을 끓여 먹거나, 혹은 피자를 시켜먹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제 딸이 밥을 먹다가 밥알을 몇 개 남기고 "다 먹었어요."하고 그릇을 설거지통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애야, 이리 와봐라. 이게 어디 다 먹었니 ? 마저 먹어라." 하고 말을 하곤 합니다. 거기다가 덧붙여 한바탕 훈계를 합니다. "애야, 지금 북한에는 어린이들이 밥을 못 먹어 굶주리고 있는데 이렇게 밥을 남기면 되니 ?"
여러분,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하고는 결코 인생을 논하지 마라." 즉 배고픔의 극한 가난과 굶주림을 겪어본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의 사는 태도나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굶주림을 겪어본 사람은 자신의 입에 밥이 들어갈 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굶주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입에 밥이 들어갈 때 너무도 당연히 생각합니다. 따라서 감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극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극한 상황은 나를 더욱 인내할 수 있게 하고, 나를 더욱 감사하게 하고, 나를 더욱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고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극한 상황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경우도 외국 땅에 이민 가서 기근과 전쟁을 겪었고, 자기의 아내도 남에게 빼앗기는 일을 두 번이나 당하는 극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또한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극한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죽이려는 아주 큰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요셉도 자기 형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하는 극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저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더욱 하나님의 사람으로 갖추어져 갔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쓰는 사람들을 일부러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 상황을 더욱 세게 겪으면 겪을수록 그 사람이 훌륭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이 나옵니다. 당시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은 로마 제국의 착취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본문에도 언급한 것과 같이 이들은 극한 가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러한 극한 가난이 오히려 저들에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고, 더 나아가 힘에 지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극한 상황에 처하므로 저들의 믿음은 더욱 순수해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좋아지면 오히려 신앙은 타락과 나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극한 상황을 겪어보는 것도 신앙의 큰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극한 상황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신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때때로 삶이 힘들고 목표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극한 상황을 기억해 보십시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 믿는다고 사자 밥이 되고, 각종 극형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켰는데 내가 이렇게 신앙이 나태지면 되겠는가 ?" 하고 자신을 추슬러 보십시오.
혹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자신보다 더욱 어려움을 겪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그 극한 어려움을 잘 극복한 것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지십시오. 여러분, 역사를 통해 볼 때 한국 사람들은 어려움이 다가올 때 이를 극복하는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 민족은 참으로 극한 어려움을 많이 겪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제까지 잘 극복하여 왔습니다.
특히 들어보신 지 모르겠으나 일제 시대 때 '이육사'라는 민족저항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시 중에 '꽃'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하늘도 끝난 곳,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곳, 추운 북쪽 툰드라의 척박한 땅에 있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는 다가올 봄날을 위해 꽃을 피우겠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하루도 쉬임없이 정진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캐나다 땅에서 살다 보면 때로는 환경이 너무 좋아서 그만 꿈과 희망과 목표를 잃고 방황할 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외국 땅에서 살면서 극한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이전에 극한 상황에 처했던 자신의 모습이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 시대의 극한 상황에서도, 6. 25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혹은 민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 바쳐 나아갔던 위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각오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해 보십시오.
얼마 전 "Never ever give up"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큰 황새가 개구리를 입에 물고 막 삼키려는데 그 개구리는 자신의 머리가 이미 황새의 입 속에 들어갔어도 손을 뻗어 있는 힘을 다하여 황새의 목을 조여 더 이상 황새가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즉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외국 생활을 하면서 극한 상황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이전에도 당신은 그러한 극한 상황을 잘 소화해 냈었습니다. 고로 외국 땅에서 당하는 지금의 극한 상황도, 앞으로 다가올 극한 상황도 잘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의 극한 상황을 잘 감당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