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항상 힘쓰고

날짜: 
2005/05/30
설교: 

골4: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 신약 성경의 거의 절반을 집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 즉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리적 교훈이요, 둘째는 실천적 교훈입니다. 특히 실천적 교훈 가운데 사도 바울은 오늘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1. 기도를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기도가 없는 기독교는 죽은 종교로 전락되고 맙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인은 죽은 신앙인입니다. 고로 성경은 무엇보다도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도를 항상 힘쓰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끝까지,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열성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끝까지 해야 합니다. 하다가 그만둔 기도는 의미도 결과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계속해서 열성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제 한 시간 기도했으니 오늘은 기도를 쉬자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호흡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평생에 기도를 멈추면 안됩니다. 기도가 떨어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고 맙니다.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있는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하지만 특히 교회에 오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기도는 하지 않고 비둘기 팔고, 돈 바꾸고,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이들을 채찍으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마11:17)
여러분, 교회에서 기도는 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성전을 주신 것은 성전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에서 나 혼자 은밀히 기도를 하고 싶은데 그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기도할 명당자리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성전에는 이층 발코니가 명당자리입니다. 강당 앞에 있는 양쪽의 두 방과 그 옆의 층계도 좋은 기도의 자리입니다. 체육관에는 앞에 있는 양쪽 두 방이 명당자리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밑에 여러 방들이 있지만 보일러실도 좋은 기도자리입니다. 특히 보일러 소리가 요란하게 나므로 문을 닫고 웬만큼 통성기도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날씨가 괜찮으면 성전 뒤쪽 야외든지 성전 양옆에다가 의자를 갖다 놓고 기도하면 그늘도 지고 괜찮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기도할 자리를 찾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새벽기도나 철야 기도를 상당히 신경 쓰며 산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어느 지방에 가던지 기도할 자리를 찾다가 하나님의 인도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이곳 캘거리에서 여러분의 기도의 명당자리는 어디입니까? 아직도 그 명당자리를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아 슬프도다!)
여러분, 이곳 캘거리에서 경치 좋은 명당만 구경하러 다니지 마십시오. 세계 어디를 가든지 다 그곳이 그곳입니다. 좋아보았자 산이요, 좋아봤자 바다요, 좋아봤자 강입니다.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내 마음이 불편하면 뭐가 그리 좋겠습니까?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기도가 경치를 좋게 해줍니다. 기도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고로 기도를 충만히 하고 나서 경치를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기도를 충만히 하고 나서 자기 아내와 남편을 보면 아름답고 귀합니다. 기도를 충만히 하고 나서 목사님을 보면 목사님이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부족하면 모든 것이 별로입니다. 인생 자체가 별로입니다. 고로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라”
2.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신앙은 이지러진 신앙입니다. 기도에 감사가 빠지면 바람 빠진 튜브와 같습니다. 즉 반드시 기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독일의 재무장관을 역임한 마르티 바덴이 젊은 시절 지방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당장 구두를 살 돈도, 살 곳도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여관주인은 미안해하며 창고에 있던 헌 신발 한 켤레를 빌려주면서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마지못해 교회에 따라간 그는 하나님께 투정어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훔쳐갈 신발이 그렇게도 없던가요. 왜 나 같은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도록 놔 두셨습니까?" 그는 도무지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도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당 안을 두리번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남자는 비록 옷은 남루했지만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티는 그 남자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마르티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지만 저 사람은 신발 신을 두 다리마져 잃어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마르티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훗날 마르티는 "내 생애 중 가장 감격스런 예배는 그때 시골교회에서 드린 예배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3.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3:36을 보면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쟁터에서 일선을 지키는 파수병이 졸고 있는 모습을 상관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아마 크게 징계를 받던지 영창에 가고 말 것입니다. 고로 한국 전쟁의 영웅인 맥아더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할 파수군들입니다. 파수군이 잠을 자고 졸고 있다는 것은 근무태만입니다. 한순간에 자기를 죽이고 아군들을 죽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고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마가복음 13:37을 보면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졸고 있다가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할 사람이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죽고 나의 가족 나의 교우들을 죽이게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가라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농부가 좋은 씨를 밭에다가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알곡들 사이에 가라지가 듬성듬성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인이 주인 농부에게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그러자 주인 농부가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구나!”(마13:25)
즉 영적으로 잠자는 동안에, 졸고 있는 순간에 사단이 방해 공작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망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주의 씨앗을 심고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편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지만 원수가 그 기회를 노리고 들어와 내 목에다
칼을 대기도 하고 나의 식구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교회에는 깨어있는 파수군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단이 틈타지 않습니다.
4.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업이 안되면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전도가 안되면 전도가 잘되게 해달라고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전도에 그렇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안되면 고통을 당해도 전도가 안되면 고통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전도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로 둔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일은 부업이요 전도가 주업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전도가 주업이라고 생각하는 성도가 많으면 그만큼 그 교회는 빨리 부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전도가 주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단지 사업장이요, 사교장이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의 만족을 위하는 곳으로 착각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서로가 합력하여 일하는 곳입니다. 만약 교회가 전도를 위하여 합력하여 일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사교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문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전도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바로 이 고백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것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즉 그는 전도를 위한 인생으로 하나님께 잡히고 매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행하는 것은 전도를 위한 것이요, 가르치는 것도 전도를 위함이요, 매 맞고 고통을 당한 것도 전도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죽은 것도 전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도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전도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외국인데 누구를 전도하나요? 전도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물론 이 말에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 전도에 대하여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며칠 전 저희 집에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들이 여기에 한국 사람이 사는 줄 알고 찾아 온 것입니까?
아마 한인 주소록을 보았던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외국 땅에서 한국 사람을 찾아내서 전도까지 하려는 그들의 열심을 보고 저는 감탄했습니다. “햐, 이단도 전도하려고 저렇게 애쓰는구나!”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하고 질문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보다 전도의 열정이 없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가 안된다, 못한다고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런 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께 전도가 잘 되게 해 달라고,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의 기회가 포착이 되면 반드시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쏟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 부지런히 전화를 해야 합니다. 차량을 동원하고, 온 가족이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너와 나의 인생이 전도에 매여져야 됩니다. 전도를 위해서 죽고 전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같이 한번 따라하십시다. ”하나님, 저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해 주세요. 하나님, 저의 인생을 전도하는 데에 꼭 매이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는 전도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고, 전도 때문에 이 땅에 왔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의 본문 말씀을 할 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어떤 환경에 있든지, 한국이나 캘거리나 어디서든지 사람이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활기차게 만들어 주십니다. 전도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큰 특권이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있습니다. 하늘에도 있고 이 땅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 캘거리에서도 전도하려고 애쓰는 저와 여러분을 우리 하나님은 귀중히 보시고 있습니다. 이 귀중한 자리의 중심에 저와 여러분들이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