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과연 윤리와 상관이 없는가?

날짜: 
2007/07/31
설교: 

마5:13-16 기독교는 과연 윤리와 상관이 없는가?
얼마 전 한국에는 황우석 박사님에 대한 뉴스를 많이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황우석 박사님은 한국이 낳은 생명공학의 거장이십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어 잠시 설명을 합니다. 이 분의 연구하는 분야는 현대 의학으로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난치병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 것입니다. 그중 인간의 신체는 상처를 입게 될 때 스스로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장 근육이라든지, 뇌신경이라든지, 척추신경 같은 것은 한번 망가지면 다시 복원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상하게 되면 다른 것으로 대체를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의학자들은 인공장기를 개발하였고 이에 따른 성과는 극히 미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기로 대체를 해보는데 그럴 경우 서로의 면역체계가 맞을 확률이 적고 다른 사람의 장기를 환자의 장기에 갖다 붙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희생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 애호가들의 반대가 있지만 의학적으로 인간과 비슷한 장기를 가지고 있는 침팬지나 돼지의 장기를 인간에게 갖다 붙이려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원숭이의 경우는 체중이 35kg 정도 밖에 나가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침팬지의 장기를 갖다 붙이면 우리 몸속에서 침팬지 체중인 35kg 정도의 작은 장기로 밖에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침팬지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의 장기를 사용해 보았는데 이것은 침팬지와 반대로 우리의 몸속에서 3년 정도면 있으면 돼지의 몸무게인 300kg 정도의 아주 큰 장기로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몸속에 돼지의 심장을 갖다 붙이면 3년 후에는 그 심장이 자라나 우리 몸에 온통 심장으로 꽉 차서 역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몸무게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 미니 돼지를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돼지가 가지고 있는 면역체를 없애고 인간의 면역체를 집어넣는 작업도
하고, 돼지가 가지고 있는 균을 없애기 위해 무균 돼지라는 것을 발명 했습니다. 지금 황우석 박사님이 연구하는 분야 중 하나는 무균돼지를 대량으로 생산해 이것을 인간에게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황우석 교수님의 연구 분야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배아줄기세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돼지가 인간의 장기를 공급해준다고 해도 사람의 뇌신경이나 척추신경과 같은 분야는 돼지의 것으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습니다. 고로 사람의 모든 신경과 세포와 조직과 장기를 대체할 만한 것을 찾아야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배아줄기세포’라는 것입니다. 배아줄기세포는 핵을 제거한 난자에다 인간의 체세포를 넣고 전기충격을 가하면 세포분열을 일으키어 배아줄기세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배아줄기세포는 만능세포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모든 신경과 조직과 세포와 장기를 만들어 내는 세포입니다. 그리고 이 배아줄기세포를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하면 여기에서 인간의 눈만 나오기도, 인간의 신경만 나오기도 하고, 인간의 심장만 나오기도 하고, 인간의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부속품 공장에서 대량으로 엔진과 수많은 부속이 생산되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고로 누구든지 이 배아줄기 세포를 사용하면 면역체의 부작용이 없이 완벽하게 몸의 어느 곳이든지 망가지면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로 인해 배아줄기세포 치료술은 아직 인간에게 적용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의학자들이 인정하므로 ‘21세기 꿈의 의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아줄기세포를 여성의 자궁이나 시험관에 넣으면 체세포를 제공한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 복제되어 나옵니다. 자칫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고로 선진 각국은 이에 대한 윤리 규정을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생명윤리법입니다. 이 생명윤리법을 파괴하면 자칫 인간사회가 공멸될 수가 있기에 마련한 윤리규정인 것입니다.
이번 황우석 박사님 사건에서는 난자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윤리가 무시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난자는 매매하지 않는 것이 생명윤리법인데 그 난자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윤리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률은 매우 적습니다만 황박사님의 논문에 나온 배아줄기세포가 가짜라면 황박사님은 학자로서의 윤리성을 상실하여 본인은 물론 한국 과학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즉 의학이 아무리 좋지만 윤리가 빠진 의학은 받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나빠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윤리가 빠진 의학,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처음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에 심한 핍박이 있었던 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이 크게 오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00년 전의 한국은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문화가 한국사회계층을 양반과 상놈으로 가르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기독교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부모공경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교문화와 충돌이 되어 ‘기독교는 윤리를 모르는 상놈의 종교다’고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에 대하여 굉장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자녀의 윤리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는 것은 믿음의 법칙이지만 행함 없는 믿음, 윤리가 빠진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믿는 자가 불신자들보다 윤리와 도덕 면에서 처지면 더욱 비난을 당하게 됩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윤리가 빠지면 복음의 능력이 결국 상실되고 맙니다. 즉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함께 윤리가 수반되어져야 합니다.
고귀한 사랑에도 윤리가 빠지면 불륜이 되고 맙니다. 고로 성경에서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 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의 본질은 윤리와 도덕이 바탕이 되어야 한층 순결해지고 고귀해진다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빠진 사랑은 천박해지고 세상 쾌락적이 되고 맙니다.
윤리가 빠진 사랑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동성연애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은 사랑을 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윤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증하다고 합니다. 사랑이 왜 가증하냐고요? 그렇게 묻지 마십시오. 그 사랑에는 윤리가 빠졌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리가 빠진 가증스런 것을 자꾸 사랑이라고 우기면 곤란해집니다. 그렇게 우기면 성경을 뜯어 고치던지 하나님의 성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행해야할 윤리 규범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중요시합니다. 물론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윤리가 빠진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윤리가 빠진 소망은 헛된 소망입니다. 윤리가 빠진 사랑은 가증합니다. 만약 하나님에게 윤리가 빠졌다면 하나님으로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윤리가 없는 세상, 공허합니다. 윤리가 없는 세상, 암흑입니다. 윤리가 없는 세상, 살벌합니다. 윤리가 없는 세상,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가증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도덕과 경우를 모르면 더 이상 성도님이라고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윤리가 빠진 성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올바른 윤리와 도덕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말씀합니다. 즉 바른 윤리를 가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에게는 또한 물질 윤리도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창남을 가리킵니다. 즉 자기 몸을 불의하게 음행으로 사용하여 번 돈을 하나님 전에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돈을 벌어도 하나님의 윤리에 맞게 벌어야 합니다. 회사 사장이 되어 회사원들에게 제대로 월급을 주지도 않고 자기만 부자 되려고 하고, 남을 속이고 폭리를 취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물질을 쓸데에도 하나님의 윤리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돈 몇 푼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돈을 물 쓰듯 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윤리가 빠진 돈의 수입과 지출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목사님들 사이에도 목회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목회할 때 남의 터 위에 건축하는 것을 성경이 금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면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을 할 때에 조금 고생이 되더라도 윤리적으로 바르게 해야지, 남의 교회를 파괴하고 다른 교회 성도님들을 미혹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떤 교회의 부목사님으로 있다가 곧 바로 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전 교회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경우로서 목회자들 사이에서 지탄을 받는 경우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다른 교회의 성도님들을 필요로 할 때에는, 예를 들면 어느 교회에 부흥회에 특송을 한다거나 연주를 할 때에는 상대방 목사님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윤리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성도님들도 “우리 교회 목사님에게 먼저 말씀을 드리시지요?” 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윤리요 바른 자세입니다.
만약 이런 기본 윤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당하는 상대방은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감정이 상하게 되고, 결국 서로간의 화목한 관계가 깨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이곳 캘거리의 목사님들은 목회 윤리가 잘 지켜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화목하고 서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교회의 성도님들도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고 올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학생이 가정에서 학교를 갈 때에는 부모님이나 어른에게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보고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특별히 어디 먼 곳을 가거나 부모님이 모르는 특별한 일을 할 때에도 부모님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몰래 하면 부모님은 화가 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님들이 목사님이 알지 못하는 단체 행동이나 중요한 신앙적 행위를 하는 데에도 목사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한마디 보고도 없이 하면 그것은 목사님을 무시하는 행위요,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비윤리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이렇게 목사님이 모르는 일을 할 경우가 생기면 미리 “목사님, 저희들이 이런저런 모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보고를 한 후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그것이 바른 성도님의 윤리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가 군대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요한 일을 부하가 상관의 허락도 없이, 보고도 없이 하면 그 일이 아무리 잘되어도 그 부하는 그것이 상관에게 발각되는 날 아주 재미없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관에게 일단 보고를 하면 그 책임은 피해갈 수 있습니다. 고로 군대에 가면 ‘보고철저’라는 표어를 아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아주 쉬운 일이고 기초적인 사고방식인 것 같은데 이것을 못해서 문제가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이곳 캘거리에서 지내다 보면 차가 있는 분이 차가 없는 분을 위하여 라이드(ride)를 해주기 위하여 서로 몇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면 상대방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주어야 합니다. "아, 전데요. 오늘 제가 아파서 도저히 약속을 못 지키겠는데요. 혹시 이곳에 오셔서 허탕을 칠까봐 미리 전화를 드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기초적인 상식이요 윤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상대방을 몇 번이나 허탕 치게 만들고 나서 상대방이 마음이 상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 쩨쩨하게 뭘 그것을 가지고 토라지고 그래?” 거기다가 이렇게 한 마디 덧붙여 보십시오. “남자가 속이 좁아가지고 말이야!” 하면서 도리어 자기가 마음이 넓고 상대방은 마음이 굉장히 좁은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상대방은 기가 막혀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후의 관계는 나빠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 성도님들을 대하면서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봅니다. 며칠 전에 처음 대하는 분에게 장거리 전화를 받았습니다. 캐나다 어느 지역에 사는 성도님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어떤 문제가 있고, 이런 저런 좋지 못한 점이 있는데 그곳은 어떤가요?“ 이럴 때 참 대답해주기 난감합니다. ”글쎄요. 사람 사는 곳에는 문제가 다 있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도하고 서로 참으면 더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대답을 해주면서 전화를 끊고 나면 마음이 좋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저런 사람 우리 교회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요. 처음에 교회를 정하려고 하는데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제가 만약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다가 괜히 그 교회에 목사님이나 성도님들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 번에 인도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는 곳에서 제가 어려워도 최선을 다할게요.”
여러분, 어느 쪽이 바른 마음, 바른 윤리를 갖춘 성도님입니까? 그리고 어느 쪽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말세가 되어서 그런지 참으로 비극적인 경우도 봅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성도님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월급을 받는 사람이고 성도님들은 목사님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니까 목사님은 성도님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을 마치 자기 종을 부리듯이 부려먹으려는 합니다. 더구나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목사님을 나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안나가면 이렇게 저렇게 어쩌구 어쩌구... 합니다. 물론 여기와 전혀 다른 동네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믿음도 능력도 사랑도 필요하지만 윤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더욱 튼튼해지고, 능력이 올바르게 나타나며, 사랑도 고귀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독교 윤리관이 바르게 잡힌 성도가 결국 하늘나라를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기 위하여 기독교 윤리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바른 윤리와 함께 행함 있는 믿음의 자녀들을 크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