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참으라

날짜: 
2004/11/01
설교: 

약5:7-11 길이 참으라
서양에서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의 진주를 가리켜서 영어로는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뜻의 진주를 주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얘야, 네가 이 다음에 시집살이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이다! 때로는 속상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러면 네가 오늘 흘리는 눈물이 내일에 가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로 바뀔 수가 있단다!” 아마도 이러한 뜻으로 진주를 주는 줄 압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진주는 땅에서 캐내는 보석이 아닙니다. 바다 속의 조개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모래알이 조개의 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깔깔한 모래알이 보드라운 조갯살 속에 박히게 될 때 조개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깔깔한 모래알이 조개의 보드라운 살에 박히게 되면 조개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된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조개가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은 조개가 모래알 때문에 병들고 맙니다. 살이 썩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얼마가지 않아 그 모래알 때문에 조개가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조개가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nacre(진주층)”라는 생명의 즙을 조개가 짜냅니다. 조개는 이 생명의 즙으로 자기 몸 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계속해서 덮어 싸고 또 덮어 쌉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동안을 계속해서 생명의 즙으로 모래알을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 속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체념해 버리면 우리의 삶이 그만큼 병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시련이 임할 때 “내가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값지고 더 크겠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한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을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는데 그 성에는 모두 열 두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이 모두 진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주를 만드는 것과 인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7절에도 이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여러분,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세 가지 종류의 모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농부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욥입니다.
1. 농부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농부에 대해서 배울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입니다. 즉 농부는 참을 줄 압니다. 둘째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입니다. 즉 농부는 또한 기다릴 줄도 압니다.
먼저 농부의 참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열매가 하룻밤 사이에 쉽게 맺혀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농부가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땀을 흘리면서 수고해야 합니다. 쌀 한 톨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농부는 엄청난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자로 쌀 미(米)자를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가운데 열 십(十)자가 있습니다. 그 위에 여덟 팔(八)자를 거꾸로 표기하고, 아래는 여덟 팔자(八)를 바르게 표기해서 포개 놓은 형상이 바로 쌀 미(米)자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농부가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서는 팔십 여덟 번의 수고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쌀 한 톨을 만들기 위해 울며 씨를 뿌려야 됩니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도 참아야 됩니다. 아울러서 뜨거운 땡볕도 참아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 땀흘리고 모든 수고를 인내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또 농부는 참을 줄도 알지만 아울러서 기다릴 줄도 압니다. 여러분, 빨리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해서 덮어놓은 흙을 헤적거리는 농부를 보셨습니까? 줄기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서둘러 줄기를 땅위로 뽑아 올리는 농부를 보셨습니까? 극성 피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땀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수고하지만 그 결과를 모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맡기는 것입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께 맡길 줄을 압니다. 기다릴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농부처럼 최선을 다하되 “때가 되면 반드시 귀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조바심을 느끼지 말고, 기다릴 줄 아는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할 줄 압니다.
2. 선지자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위대한 종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평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모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똑같이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매맞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목베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모든 고난을 참고 또 참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위해서 모든 시련을 참고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지자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선지자적 인내와 농부적 인내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농부는 무엇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까? 귀한 열매를 위해서 인내합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예컨대 학생이 조금 더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밤에 잠이 오는 것을 참고서 공부합니다. 또 사업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땀흘리며 일을 합니다. 이러한 인내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적인 인내는 다릅니다. 선지자는 누구를 위해서 참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 참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참는 농부적 인내에서 우리가 한 걸음 더 올라가 다른 사람 때문에 참는 선지자적인 인내를 배워야 될 것입니다.
3. 욥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에게 엄청난 시련이 임했습니다. 본시 그는 동방의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재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욥은 이제 더 이상 농부처럼 자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할 필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욥은 농부적 인내의 한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욥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일곱이 있었습니다. 또 딸 셋이 있었습니다. 사고로 인해서 한꺼번에 모두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그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욥은 선지자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참아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욥이 선지자적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욥의 몸에 심한 악창이 솟아났습니다. 살이 썩어 들어갑니다. 욥은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치 아니했습니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욥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했습니다. "내가 모
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욥은 하나님 때문에 참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참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왜 지금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건강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이것이 우리의 시작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은 악이 아닙니다. 시련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진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잘 인내하고 길이 참고 기다리면 내일이면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고로 농부의 인내를 본받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 기다리면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의 인내를 본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참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을 위해서도 참을 수 있는 선지자적 인내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욥의 인내를 본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모든 시련을 이기고 참았던 욥의 인내를 본받으므로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