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고난을 채우노라.

날짜: 
2014/04/12
말씀: 
골1:24
말씀구절: 

24 <교회를 위하여 바울이 하는 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설교: 

너무나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나타나면 주변이 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머니의 얼굴은 세상에서 그렇게 추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불에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은 흉측한 얼굴이었습니다. 딸은 친구들에게 어머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은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배고플 것을 걱정하여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갔습니다. 딸의 교실을 찾아 갔습니다.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야?” 이 여학생은 도시락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어머니 듣는 데서 말했습니다. “응, 우리 집 식모야.” 그리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어요?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요.” 그때 어머니가 울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아! 엄마 얼굴이 이렇게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 있단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란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마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만 있었단다. 내가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미 집은 불덩어리였지.

그러나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 갔다.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말렸다. 소방수들도 네 생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갔지. 안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나왔다. 나는 너를 안고 있기에 내 얼굴을 무엇으로 가릴 수가 없었다. 너만 꼭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화상을 얼굴에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얼굴은 이 모양이 되었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하여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내가 당할 그 고통과 그 고난을 어머니가 당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당할 고통과 고난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오늘 고난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대속의 고난

예수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좀더 실감이 납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절)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나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나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내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나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원한 나무 밑에서 한 성인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선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도가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배고픈 귀신인 아귀에게 쫓기던 불쌍한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품안으로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성인은 그 비둘기를 품에 감싸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귀가 요구합니다. “여보시요. 그 비둘기는 내 밥이니 나에게 내어주시오.” “나는 내 품으로 들어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비둘기를 네게 내어 줄 수가 없다.” “난 배가 고파 죽겠으니 빨리 내어주시오.” “나는 이 가련한 비둘기의 생명을 내팽개칠 수가 없다. 차라리 비둘기 무게만큼 내 살을 베어 주겠다.”

성인은 양쪽에서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 쪽에 비둘기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살점을 더 베어서 저울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울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아귀는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며 꽃잎이 휘날렸습니다. 성인은 그제야 도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려는 곳에 생명이 사는 것을 깨달았고, 생명 바쳐 전적으로 헌신하는 곳에 성취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예화를 통하여 보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딸 대신에 어머니 얼굴이 망가졌고, 비둘기 대신에 성인의 살점을 잘라진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2. 자원하신 고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스스로 자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지 힘이 없어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줄 착각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아직 메시아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면 그렇게 힘없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쇠 조각이 박힌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대못에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고난으로 인하여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징계를 받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이는 우리 병을 고쳐 주시려는 고난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자원하여 당하셨습니다.

3. 남은 고난

예수님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즉 우리가 감당해야할 남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남은 고난을 직접 받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고난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분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리핀에는 고난주간에 실지 자신도 예수님처럼 채찍에 맞고, 가시에 찔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좀 끔찍하기도 하고, “그것은 아닌데,,,“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여간 그 분들의 의도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6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옛 로마의 사형틀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합니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은 고난 받을 것을 각오하고, 죽을 것을 각오하고 주님을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단지 축복 받는 것을 생각하고 고난에 동참하기는 꺼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혹은 몸을 바쳐, 시간 바쳐, 물질 드려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바른 성도입니다. 물론 외국 땅에 와서 먹고 사느라고 혹은 공부하느라고 힘이 드는데 고난에 동참하라고 하면 무거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분을 위하여 이 외국까지 와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요,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마음에 새기시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