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동영상)

날짜: 
2013/06/15
말씀: 
겔16:1-8
말씀구절: 

(겔 16: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겔 16: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겔 16: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창11:25-29
(겔 16: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겔 16:5)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신32:10
(겔 16:7)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겔16:22
(겔 16: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겔16:1-8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지지난 수요예배 때에 참석한 분들을 비롯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부터 제가 이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여러분! 뭔지 모르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참 죽을 일이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김학윤 황현지 성도님의 아들 하음이가 백일이 되어서 떡을 하고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를 합니까? 그 이유는 젊은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연세가 드신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는 의료 제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약도 없어서 태어나자마자 죽는 신생아가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아이가 백일을 넘기면 죽을 고비 중의 큰 고비를 넘겼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살았구나!" 하고 백일잔치를 하는 겁니다.

찬송가 474장 3절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여러분! 제법 인생을 사신 분들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를 할 때에 보면 참으로 많은 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를 합니다. 이 가운데에도 죽음의 일보직전에서 살아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난 주일에 식사를 하다가 우리 교회 이승형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옛날 일제 강점기 때에 징병으로 사이판 섬에 끌려가셨는데 거기서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 일본 군인들도 사이판 섬에 가면 거의 죽었는데, 한국 사람이 징병으로 끌려가면 100명이면 거의 100명이 죽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버님이 살아나셔서 제가 태어난 것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버님이 6.25 전쟁을 치르신 분입니다. 가끔 이야기를 하실 때에 보면 죽음의 고비를 많이 넘기고 살았다는 겁니다. 글자그대로 전쟁터에서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스쳐 지나가는데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각자 탄생의 비밀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러분들도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수많은 남성의 정자 중에 하나만 살고 나머지는 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기적적으로 아주 럭키하게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죽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때로는 진실해지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인생무상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해서 평상시에는 그렇게 대수롭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아주 가까이 있는 부모님의 죽음이나, 배우자의 죽음, 혹은 가족 식구들의 죽음 앞에 설 때면 "아하, 죽음이 나와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구나!" 하고 느끼면서 죽음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이고 럭키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들은 둘째 죽음,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첫째 죽음인 육체적인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 참 안타깝지만 우리들은 모두 죽습니다. 죽음의 법칙에 예외인 사람은 역사상 딱 두 사람뿐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에녹과 엘리야뿐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계셨기에 십자가에서 죽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시고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여러분! 예수님조차도 죽음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고상하게 시적으로 표현해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지, 좀 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한 마디로 "살려주세요."라는 절규입니다.

강물에 어떤 사람이 빠졌습니다. 수영은 전혀 못합니다. 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살려주세요."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역시 한 마디로 "살려주세요."입니다. 또한 극한 어려움에 봉착하여 인생이 참 난감하고 다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외치는 소리도 역시 "살려주세요."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이런 기도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저도 살려주시고, 아내도 살려주시고, 딸도 살려주세요. 그리고 아무개 성도도 살려주세요." 물론 지금 당장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죽을 징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 다가올 때 아주 순식간에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를 당하여 손을 쓰려고 하면 이미 늦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응급처치 요령이 벽에 붙어있습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응급처치 요령도 막상 자신이 당하게 되면 손쓸 틈도 없이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별로 없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유명한 우주과학자에게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가 소행성과 부딪힐 확률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만약 지금 당장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그 기자는 과학자의 입에서 그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어떤 대책이 있을 거라는 대답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책임 있는 우주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는 기도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대답에 기자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아니, 그래도 책임이 있는 우주 과학자가 어떤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기도해야지요.'라는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 참 무책임하다."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과학자, 참 솔직하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지금 현재의 과학으로는 소행성이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괜히 인간이 실력도 안 되는데 할 수 있다고 뻥을 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겁니다.

물론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고 참으로 책임감 없는 행동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불가능한 상황에서, 혹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도리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세계 역사를 주장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고로 크리스천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이 주어지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가장 다급한 기도는 무엇보다도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겁입니다.

한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거기에 깔린 사람들이 외침이 무엇입니까? "살려주세요."입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불 속에 갇혔습니다. 그 속에서 외치는 간구가 무엇입니까? "살려주세요."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강물에 뼈져가면서 외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으악- 살려주세요."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살려주세요."라는 말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911 테러 사건 때에 비행기가 무역센터 건물에 부딪힐 때 어떤 분은 제대로 비명 소리도 못 지르고 죽었습니다. 즉 인간의 죽음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가면 이것이 오히려 어려운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에 비해 다행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역시 힘든 것입니다. 둘째 죽음인 영원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첫째 죽음인 육체의 죽음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아직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음에 대하여 준비가 되지 않고, 아직 정리하고 해야 될 일이 많은데 갑자기 죽음이 다가오면, 마치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다가 휴지가 없어서 난감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날 때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죽음이 올 것 같으면 미리 준비하게 하옵소서. 미리 가르쳐 주옵소서." 그래서 그런지 저희 가정에 보면 아버님과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에 하나님이 미리 저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즉 부모님에게 암이 걸리는 것을 몇 년 전부터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살려주세요."라고 미리부터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계속 옵니다. 부모님이 천국에 있는 꿈을 꾸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가족들이 미리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리고 좀 더 편안히 고통 없이 가실 수 있도록 기도를 해드리고, 돌아가시는 분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며 뒷정리를 다 마치시고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갈 때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아직 갈 때가 안 되었다면 우리들의 생명을 쥐고 있는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해볼 만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특별히 목사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개 성도님이 교회에 계속 나오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아무개 성도, 그냥 나두면 죽습니다. 그를 살려 주세요."

이렇게 우리가 살려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시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오늘의 말씀을 앞에서부터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은 예루살렘을 인유화하여 말한 겁니다.

자고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즉 너와 내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예루살렘은 마치 이방의 죄많은 민족과도 같았습니다. 그 예루살렘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예루살렘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핏덩이채로 버려진 상태와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 갓난 아이, 핏덩이를 살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나두면 그 핏덩이는 그냥 죽고 맙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옆을 지나가시면서 예루살렘이라는 핏덩이를 향해, 너와 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 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돌이켜 보십시오. 이런 저런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살 수 있을 만한 의미도, 용기도 없어집니다. 너무도 큰 인생의 고난과 상처 앞에서 그냥 죽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칩니다. "하나님, 날 좀 살려주세요."

여러분! 인간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살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기에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목사가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 아무개 성도를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기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시대입니다.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비참해지고 초라해지는 시대입니다. 이때 한 가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 2013년 합심기도 제목을 보십시오. 주님의 재림과 휴거를 준비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장차 이 땅에 다가올 7년 대환난이 너무나 세기 때문에, 자칫 그때에 휴거되지 못하면 신앙을 포기하여 영원히 죽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미리부터 깨어서 기도하며, 흰옷을 입고,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살기 위한 대책을 미리부터 세우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려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다가올 홍수 심판을 미리 계시 받아 이에 대비하여 방주를 미리 짓고 예비함 같이, 우리들에게도 뭔지 모르지만 장차 환난의 홍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을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서 기도하면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미리부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기도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여러분! 나 같은 피투성이, 그냥 세상 가운데 던져져서 허우적대는 피투성이가 살 가망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는 살라."고 하셨으니 이제 나는 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가 나옵니다. 그는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찾아와서 왕에게 직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20:3)

이게 한 마디로 무슨 기도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즉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20: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 봅시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주시고, 부모님을 살려주시고, 아내와 남편을 살려주시고, 자녀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우리 교회 아무개 성도님을 살려주시고, 목사님도 살려주세요."

여러분! 살려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과 죽음을 주장하고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살려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들으면 하나님은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살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마치 히스기야가 살려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그를 15년 더 살려준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려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를 살려준 그 분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외치고,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심으로 남은 인생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영원히 죽을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주었습니다. 지옥에서 건져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살려준 하나님을 위해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그때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계속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이곳 캐나다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 기도, 그 외침, 그 절규를 듣고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