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날짜: 
2015/10/31
말씀: 
사43:19-20
말씀구절: 

...

설교: 

하나님께서는 바벨로니아로 끌려가 포로생활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곧 나타낼 것이라."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 행하실 그 새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
여러분, 이스라엘 광야의 특징은 나무 한 그루 풀한 포기는 물론이요, 전혀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 한가운데에서는 방향의 식별을 가능케 해줄 표식이 전무합니다. 그리고 사막의 특징은 생명의 상징인 물이 없는 것입니다. 즉 광야나 사막이나 모두 죽음의 상징인 것은 그 곳에 있어야 할 길과 물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의 광야 속에 길을 내실 것이라 말씀하시고, 그 죽음의 사막 속에 강물을 터트릴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곳을 생명의 진원지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지금 당장의 상황을 볼 때에는 광야는 여전히 길 없는 광야일 뿐이요, 사막은 단지 물 없는 사막일 따름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양식도 없고, 생명도 없고, 기쁨과 평안도 없는 광야와 사막과 같은 심령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당장은 길 없는 광야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장차 광야에 길이 생길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강은커녕 우물하나 발견할 수 없는 메마른 사막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이제 곧 흐르게 될 강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인생을 살면서 광야와 같은 거친 역경과 사막과 같은 절망의 세계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인종과 문화와 언어와 음식이 다른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아, 여기가 바로 길 없는 광야구나! 아, 여기가 바로 물 없는 사막이구나!’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지금 이러한 광야와 사막의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거친 황량한 광야와 사막만을 바라보고 절망과 탄식만 하고 주저앉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만들어 내실 길과 강물과 오아시스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소망가운데 계속 전진하시겠습니까?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속에 그들은 목이 말라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가도 가도 사막 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여기에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하십시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합니다. “애야, 인생은 지치고 고달프고 힘들 때가 있단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성공자가 될 수 없단다. 힘을 내고 좀 더 나아가자.” 그런데 그들이 얼마쯤 가니까 그만 많은 무덤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절망을 하며 외칩니다. “아버지, 이것 보세요. 무덤입니다. 우리 앞서 가던 사람도 그만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여기서 몽땅 죽었잖아요? 이제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짓고 손뼉을 치며 매우 즐거워하며 말합니다. “애야, 이제 우리는 살았다! 여기 이렇게 큰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주위에 무덤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요, 오아시스가 있다는 뜻이다. 자,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나아가 보자.”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이 조금 더 나아가 보니 아버지 말씀대로 샘물이 솟는 오아시스가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사막에서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똑같은 무덤을 보았지만 아들은 거기서 죽음과 절망을 생각해 냈고, 아버지는 오히려 삶과 소망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나는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에도 하나님은 거기에다 비손과 기혼, 힛데겔과 유브라데라는 강을 만들어 놓으시므로 아담과 하와가 살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강물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있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광야와 사막과 같은 이민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기쁨과 생명의 강물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친히 강물을 만들기 위해 역사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에스겔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강물이 흐르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으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즉 이 에스겔의 환상은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강물이 생길 수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므로 우리를 살리는 기쁨의 강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갈증에 허덕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그 옛날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 분의 자녀요, 그 분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자녀가 목이 말라죽겠다는데 생수의 근원 되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어찌 우리에게 물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양들이 목이 말라죽어 가는데 어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머지않아 광야 속에서 하나님이 뚫어 놓으실 길을 보아야 되고, 머지않아 사막가운데 터트릴 강물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당장은 길 없는 광야 한 가운데에 떨어져 있어 어디로 갈 지 막막하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은 물 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목말라 고통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는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절망과 탄식과 불평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외쳐야만 합니다.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시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하나님이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우리로 마시게 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길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소망가운데 즐거워하십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막 한 가운데에 버려져 있다 할지라도 작열하는 태양만으로 인하여 괴로워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곧 그 곳에서 터질 강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만들어 내실 광야의 길과 사막의 강들을 바라보고 서로를 격려하십시다.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이라.”
여기서 ‘시랑’이란 승냥이와 이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타조는 구약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즉 들짐승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부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새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누가 이해할 수가 있으며,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기도 : 하나님, 이민 생활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펼쳐지는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케 하옵소서.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하루하루가 새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