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날짜: 
2012/06/25
설교: 

출4:1-7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우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중대한 질문을 받은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떻든지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늘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은 모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수천 년 전의 질문이라고 해도 우리들 또한 그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합니다.
모세가 받은 질문은 아주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 하나님이 모세의 손에 들린 것이 지팡이라는 것을 모르셔서 이 질문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그 질문을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질문의 속뜻이 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의심심장한 주님의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때도 역시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모세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우리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모세의 현재 모습을 돌아봅시다. 오늘의 장면을 영화로 친다면 지금 스크린에 나오는 모세는 어떤 모습일까요? 광야에 맥이 쭉 빠진 채 털썩 주저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습니다. 눈에 초점도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삶의 어떤 꿈이나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머리는 하얗게 새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노을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힘없는 늙은이입니다. 이 노인은 지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아 왔습니다. 매일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어디 좋은 풀밭이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양들에게 풀을 뜯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 양마저도 자기 양이 아니고 장인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 동안이나 처가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이마의 주름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는데 매일의 일상은 그저 고달프기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시고 있는 겁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즉 이 질문의 의미는 지금까지 모세가 80세의 인생을 살아왔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80 인생 가운데 무엇이 남았느냐, 80세의 인생을 살면서 어떤 보람이 있었느냐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모세는 대답합니다. "지팡이입니다." 당시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황금이나 보석으로 치장된 지팡이가 아닙니다. 양을 치는 80세 노인이 자기의 몸을 의지하는 평범한 막대기입니다. 즉 지금까지 80세의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Nothing!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공주의 아들이 돼서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입니다. 당시의 왕에게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공주의 아들이 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계속 애급에 남아 있었다면 왕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 모세는 거기에 걸맞은 자질과 실력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급과 근동지방을 통치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배후를 가지고 있었고, 시대와 역사를 통찰하는 안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 왕년의 얘깁니다. 지금은 미디안 광야에서 그저 장인의 양을 치면서 사는 한 힘없는 노인입니다. 그런 노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라는 겁니다.
늙은 모세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거절이라기보다는 능력 자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재차 명령하시고 모세는 거기에 다시 반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로 오늘의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1. 이 질문은 "네가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40세가 될 때까지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힘과 능력, 권세, 거기다가 지식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동족을 위할 줄도 알았습니다. 주관과 소신과 의리까지 겸비한, 정말 너무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힘으로 한 일이 뭐였지요? 애매한 사람을 둘이나 죽였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큰 권력을 가진 모세가 사람 둘을 죽인 것은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미묘한 정치적인 사건과 연루되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애급 사람의 노예로 있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이 살인은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인 또 다른 한 사람은 애급 사람이요, 정부 관리직인 감독관입니다. 상황이 아주 미묘하게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꼬투리가 잡힐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모세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목숨 하나 건지려고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한때 왕자였고, 그래서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사람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재기를 노렸겠지만, 결국 그는 지금 양치는 목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노인이라는 사실을 지난 40년 동안 처절하리만큼 느꼈습니다. 자신의 야망, 장밋빛 환상, 화려한 재기의 꿈... 이런 것들은 이젠 모두 다 저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닙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 꿈을 묻은 저 광야와, 지금 자기가 목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낡은 지팡이 하나, 그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모세에게 찾아 오셔서 질문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가 무엇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광야의 모세처럼 여러분도 어느새 희망을 포기하고, 그저 하루하루 현실에 매여서 아무 꿈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게 뭡니까? 꿈과 희망 대신 답답함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왕의 홀이 들려 있어야 될 모세의 손에는 그것 대신 지팡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게 지금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은 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모세를 홀로 두셨을까요? 도대체 뭘 가르치시려고 혼자 그렇게 긴긴 세월을 훈련시키셨을까요? 아니 이것은 훈련이라기보다도 그냥 썩히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 광야에서 40년간 긴 세월동안 모세라는 사람을 썩히셨을까요? 딱 한 가지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 없는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 없는 인생의 결과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이것 하나 가르치시려고 모세를 40년간 혼자 광야에 두신 겁니다. 즉 네 팔십 평생 살아 온 인생의 결과는 0,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 의미가 바로 "지팡이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모두가 제로, Nothing, 0입니다. 과거가 어떻던, 지금 무엇을 하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언제나 0로 표시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나이가 80이 되어도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은 허무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죽을 때가 다 돼서 깨닫는다면 비극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의미 있는 보람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다운 인생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지팡이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2. 이 질문은 "너는 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왕궁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자기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자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 사람이 싸울 때,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애급 사람을 쳐 죽인 겁니다. 그 일 후에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목격합니다. 같은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런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마디 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이것은 모세의 꿈을 깨뜨리는 한 마디가 되었습니다. 모세 스스로는 애급의 노예생활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건 순전히 자기만의 생각이었습니다. 동족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광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꿈도 목표도 사명도 다 접어버린 노인네 목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제 내가 너를 애급 왕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니요. 그 일은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한 때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애당초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저는 단지 목자일 뿐입니다. 내가 전에 배웠던 건 그 무엇이든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이 양들과 뒹굴면서 좋은 풀밭이나 찾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민족을 구원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절한 이유가 뭘까요? 자기는 평범한 목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이제야 참 자기를 안 것인지도 모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이제야 모세는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굽니까? 내가 누구기에 나를 부르십니까? 나는 단지 양치는 목자일 뿐입니다. 나를 부르지 마세요. 나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살다 죽게 그냥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모세, 그가 진정 누군가 하는 것을 알려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우월감과 열등감의 경계에서 곡예를 하며 삽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40년의 왕궁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는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앞의 40년과 뒤의 40년은 극과 극입니다. 비교를 하려고 해도 비교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나는 대단한 존재야!" 이것과 "나는 별 볼일 없어!" 이 두 개의 자화상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둘 다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기 쉽습니다. 부자이고 지위나 명예가 높으면 귀한 존재요, 가난하고 실패하면 낙오자라고 여깁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왕자일 때는 대단한 존재요, 목자일 때는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었어요. "모세야, 환경에 따라 너의 가치가 존귀해지거나 비참해 지는 게 아니란다." 그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였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통해서 주님은 첫째, "모세야, 나 없는 삶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어. 0(제로) 이야!"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두 번째 이 질문을 통해서 "그래!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이상, 너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야. 너는 나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가 언제입니까? 젊었을 때? 왕궁에 있을 때? 지혜와 배짱이 충천할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해 있을 때? 정말 인간적으로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오셨나요? 아닙니다. 다 늙어빠진,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도 쓸모없는 폐품이 됐다고 여겼을 때, 또한 누구의 도움 없이는 설 수조차도 없을 것 같은 그때 나타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내게 오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고, 자신에 대해 한없이 절망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시간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너무도 평범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게 했던 겁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매일 똑같은 풍경에, 매일 똑같은 사람에게 40년을 담가두셨습니다. 그로 인해 모세는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고, 더 쓸모없는 자신인 것을 깨우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남들보다 더 특별해지기를 원합니다. 더 잘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환경은 도리어 나 자신이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고, 더 비천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저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범함 속에서, 아니 낮아짐과 작아짐을 통해서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겸손해지라는 뜻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렁이만도 못합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하나님, 저를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것이 이 질문에 들어있는 참뜻입니다. 아무쪼록 이곳 캘거리 땅에서 계속되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 질문은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 하는 의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천 배, 만 배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네 지팡이를 던져 봐라."고 합니다. 그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입니까?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지팡이가 갑자기 뱀이 됐습니다. 광야생활에 익숙한 모세는 뱀의 무서움을 잘 압니다.
모세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자기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몰랐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뒤로 물러서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뱀처럼 엄청난 애급을 상대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광야로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물립니다. 하지만 모세가 꼬리를 잡았을 때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그랬더니 그 손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품에 넣었다 꺼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성한 손이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이런 일을 하셨던 걸까요?
본문 5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즉 모세에게 나타난 분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오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인생 중에 함께 하셨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도, 우리들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사용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지팡이는 모세의 실패와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라하고 늙어버린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초라한 지팡이로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그 지팡이를 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40년 광야 연단은 그저 세월낭비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패와 좌절의 세월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정해놓은 섭리요, 과정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곳 캘거리에서 보낸 그 동안의 세월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세월이 아름답지 못했다고, 혹은 쓰디쓴 추억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괜히 이곳에 왔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십시오. 모세의 광야 40년의 세월을 하나님이 유용하게 쓰시듯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곳에서 겪은 쓰디쓴 추억조차도, 별 볼일 없이 일어나는 평상의 일들도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손에 들려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용한 모습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낡은 지팡이 하나입니까? 실패입니까? 허무입니까? 부족한 재능입니까? 연약한 믿음입니까? 당장 떨어진 은행의 잔고입니까?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까? 또는 상처 주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실망입니까? 그게 뭐든 이 시간 다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낡은 지팡이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그 지팡이로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질문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대답합니다. "주여, 지팡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