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날짜: 
2014/10/26
말씀: 
마22:34-40
말씀구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설교: 

혹시 인생 살면서 아픈 적이 한 번도 없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몸이 아픕니다. 자주 아픈 사람이 있고, 뜸하게 아픈 사람이 있고, 안 아프다가 한 번 아프다 하면 아주 모질게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일단은 안 아프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약을 먹든지, 병원을 가든지 병 낫기 위해 애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자연스럽게 기도도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고쳐주세요.” 저의 경우는 몸이 아프면 항상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루는 바리새인 중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지가 무슨 예수님의 담임선생님이라고 시험문제를 내는지 이것도 역시 교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King James Version이나 American Standard Version에 보면 ‘율법사’를 영어로 'lawyer'라고 번역을 해놨습니다.

‘lawyer'라고 하니까 좀 색다른 기분이 납니다. 보통 성경에서 ’율법사‘라는 단어는 법을 가지고 따지고 남을 정죄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만 제대로 믿지 못하는 냉혈동물 같은 차가운 사람 같은 부정적인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lawyer'라고 하니까 좀 좋은 느낌이 듭니다. 한국말로 하면 ‘변호사’가 아닙니까?

여기 캐나다에서도 lawyer는 상당한 지위로서 명예와 돈과 존경이 따릅니다. 그리고 글자 그대로 lawyer라고 하면 법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사는 법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특히 모세 오경을 ‘율법서’라고 하는데 그 모세 오경에 나름대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책망하신바, 법 해석을 잘못하여 법의 근본정신, 법을 세운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옆길로 새는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교만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낸 시험문제는 이것입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입니까?“ 즉 계명 중에도 아주 중요한 계명이 있고, 덜 중요한 계명이 있다고 율법사들 나름대로 주장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성경에는 여러 계명들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성경의 계명을 613 가지로 나눴습니다. 그 중에 ‘무엇을 하지마라’는 계명은 365 가지이고, ‘무엇을 하라’라는 계명은 248 가지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 율법사가 낸 시험 문제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의 이 답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의 많은 계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으로 분류하면 1-4 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이요, 5-10 계명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하나님 사랑은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은 ‘네 몸과 같이’라는 한 마디 조건으로만 되어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 사랑 즉 인간 사랑보다 더 먼저고, 더 크고, 더 많아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랑합니까?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까? 아니면 쥐꼬리만큼 사랑합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 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당장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이 뭔데 내 돈을 터치하느냐?” 하면서 회를 냅니다. 표정이 굳어집니다. 교회 안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중에는 “십일조는 안내도 된다.”고 성도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목사로서 그런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어 변개시키는 것이요,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비위에 맞추어 이리 빼고 저리 빼면 결국 많은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말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돈에 대해 시험이 잘 드는 분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네 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돈은 빠졌으니 걱정하지 말고 시험 들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남녀가 사랑을 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합니다. “오- 나의 사랑!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돈은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내 돈의 십분의 일을 달라고 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내 돈은 터치하지 말고 오직 내 마음, 내 목숨, 내 뜻만 받아주십시오.”

이때 당신이 여자라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여자가 기가 막혀할 것입니다. “뭐 이런 것이 다 있어!” 하면서 그 남자를 버리고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뭐 돈이 대수냐? 마음이 중요하지.”

맞습니다. 마음이 빠진 돈은 우리 신앙 양심에 맞지 않습니다. 마음은 없는데 사랑을 돈으로 사거나 돈으로 만사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우리들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돈은 싹 빼고 마음만 주겠다는 것은 왠지 얄미운 생각이 듭니다.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즉 마음이 있으면 거기에 돈도 따라갑니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거기에는 마음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면 돈이 사용되는 곳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땅에다가 돈을 쓸 것이고,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에다 돈을 쌓아두려고 할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누가 투자를 잘 했는지는 나중에 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네 몸과 같이’라는 조건만 붙습니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랑은 그리 강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도 참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몸이 아파보니 더욱 이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온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 몸뚱이입니다.

40년 전에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이가 많이 썩어서 크라운 한 이가 있었는데 그만 낡아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를 치료하려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치과 의사에게 떨어져 나간 이를 그냥 임시적으로 붙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달을 못 버티고 또 떨어져 나갔습니다.

중국 의사에게 갔더니 자기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국 의사에게 갔더니 역시 자기는 못 고친다고 합니다. 치과 스페셜리스트(전문의)에게 가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제 마음이 온통 그 조그만 이빨 하나에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치통을 겪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통증입니다. 어떡하든지 치료를 해야 합니다.

돈만 많으면 이것도 별 신경이 안 쓰이겠는데 형편상 그러지는 못하고, 더구나 만나는 의사가 쏼라쏼라 영어로 한참 설명을 합니다. 아- 이는 아픈데 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 나에게 그렇게 영어로 쏼라쏼라 하지 말고 그냥 니가 알아서 해라. 돈이나 많이 달라고 하지 마라.”

옛날에 저희 아버님은 치과에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의사 양반! 나 돈이 20만원 밖에 없으니 20만원 어치만 고쳐줘!” 하여간 이가 말썽이 나니까 음식을 먹을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앉으나 서나 신경이 쓰입니다. 이때 제가 회개하는 마음이 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물론 이 계명대로 사는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네 이웃을 네 돈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아내나 남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부모나 자녀처럼 사랑하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제 아내가 가끔 사이너스(sinus) 통증이 있어 잠을 제대로 못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인 저는 이상하게 잠을 참 잘 잡니다. 옆에서 보면 참 얄미울 정도입니다. 꼬집어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실천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구나!”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담임 목사인 저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솔직히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제 몸처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몸이 아프니까 솔직히 여러분 생각 별로 안 납니다.

어떤 성도님에게 문제가 있으면 저는 앉으나 서나 늘 그분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줍니다. 그런데 일단 제 몸이 크게 아프면 그 성도님의 기도는 뒤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여! 제 몸을 고쳐주십시오.” 하고 내 몸을 위해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아- 주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진짜 명언이구나!”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몸을 얼마나 챙깁니다. 몸이 아프면 시간 맞추어 약을 먹여줍니다. 몸이 피곤하면 어디서든지 쉬거나 잠을 자게 해줍니다. 몸이 배고파하면 무엇이든지 반드시 먹여줍니다. 몸이 춥다고 하면 따뜻한 곳을 찾아주든지 이불을 덮어줍니다. 몸이 목말라 하면 반드시 물을 먹여줍니다. 아- 나는 내 몸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아줍니다. 나는 내 몸의 요구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을 그렇게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웃 사랑을 제대로 못했는지 실감이 납니다. 물론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가끔 돈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따듯한 말 한 마디로 그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암으로 큰 고통을 겪고 죽어 가는데 그 고통을 내가 대신하고 죽기에는 진짜 어렵습니다. 물론 모성애가 강한 어머니의 경우 자녀를 위해 자기 몸을 던져 대신 고통을 당하고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천지원수를 위해 내 몸을 죽기까지 내놓기는 힘듭니다. 누구나 자기 몸을 최우선으로 아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원수를 위해서 귀하신 독생자의 몸을 죽이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주님!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겁니까?” 때로는 이 큰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우리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곡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끝날 까지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목표와 비전도 이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은 내 몸과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내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아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대하면서 적어도 이렇게 사랑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싶습니다. 주님이 뜻이 이 큰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니 지켜보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캘거리 동네가 작을지라도 우리는 이 작은 동네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비록 우리의 사랑의 수고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하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빚을 갚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중에 하늘나라를 가꾸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