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겼는가 ?

날짜: 
2003/10/27
설교: 

제 목 ; 누가 이겼는가 ?
본 문 ; 고후 6:9-10

모든 사람들은 패배보다는 승리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승리자에게는 박수와 환호가 주어지고 그에 따른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패배자에게는 왠지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고, 그 패배로 말미암아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의 낙인이 찍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부터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 그리고 모든 경쟁에서 남을 이겨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칫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법으로 승리를 얻어보려고 하는 잘못된 유혹을 늘 경계해야만합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저버리고 불의나 권모술수를 동원해 승리를 얻는 것을 크리스천으로서 심히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굴한 승리를 얻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떳떳한 패배를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

우리는 얼마 전 미국의 솔트 레이크 도시에서 벌어진 동계 올림픽을 기억합니다. 쇼트 트랙 경기에서 한국의 김동성 선수가 일본인이지만 미국인으로 전향한 오노 선수를 이기고 당당히 금메달을 땄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이 소식을 접한 한국 국민들은 모두가 김동성 선수를 환호하며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김동성 선수는 태극기를 흔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했습니다.
그러나 몇 분 뒤 오노 선수의 허리우드 액션에 그만 심판이 오심을 하는 바람에 김동성 선수는 실격처리가 되고 미국의 오노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노 선수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반면 김동성 선수는 고개를 떨구며 허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노 선수를 진정한 승리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가리켜 간사한 승리자, 비굴한 승리자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 다름 아닌 승리를 얻은 방법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금메달을 목에 걸고 즐거워 할 바에야 차라리 노메달이라도 혹은 꼴찌일지라도 떳떳한 경기를 하다가 무명으로 사라지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 하나님은 비굴한 승리자보다는 떳떳한 꼴찌에게 더 큰 영광과 환호를 보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얼마 전 뉴욕시의 센트럴 파크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은 큰 함성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다름 아닌 꼴찌에게 주는 함성과 박수였습니다. 마라톤 경기 사상 가장 느린 선수에게 보낸 격려였습니다. 어떤 시민은 너무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뉴욕시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그 꼴찌 선수의 기록은 자그마치 98시간 48분 17초였습니다. 등수는 1만 9천 4백 13등이었습니다. 물론 그 보다 뒤떨어진 선수는 없었습니다. 한 시간에 1.6km씩 뛴 셈입니다.
이렇게 가장 느리게 뛰어 마라톤의 영웅이 된 주인공은 50세의 `밥 윌랜드`라는 선수였습니다. 그는 월남전에 위생병으로 참전했다가 박격포탄을 맞고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두 다리가 없는 모습을 가지고 지금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시에서 체육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는 두 다리가 아닌 두 팔로 뛴 최초의 마라토너가 된 것이었습니다.
두 팔로 뛰는 자세는 목다리 모양으로 두 팔은 땅을 짚고 몸은 안은 채로 그네처럼 앞으로 밀어내는 식이었습니다. 그의 몸을 실은 안장의 무게만 해도 6.7kg이었고, 헝겊으로 감싼 두 주먹이 발의 구실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선수들보다 2시간이나 앞서 출발했지만 경쟁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매시간 휴식, 밤에는 추위와 피로에 지쳐 잠깐씩 눈을 붙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마라톤 경기는 끝이나서 `밥 윌랜드`가 도착할 골인 지점에는 골인 테이프가 치워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밥`은 계속 뛰었습니다.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에선 격려의 고함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라톤대회 본부는 `윌랜드`의 지칠 줄 모르는 집념에 감동해 경기가 이미 끝난 지 4일 뒤에 골인 지점에 다시 테이프를 걸어 놓았습니다. 98시간 48분 17초만에 그는 드디어 목표에 다다랐습니다. 물론 세계 꼴찌의 기록이요, 1만 9천 4백 13등의 꼴찌의 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창피한 꼴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마라톤 경기에서 일등한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봅 윌랜드'의 이름은 많은 시민들이 기억을 하게 되었습니다. '봅.윌란드'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자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드디어 해냈다 !" 그야말로 꼴찌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실패보다는 성공을, 패배보다는 승리를, 그리고 꼴찌보다는 일등을 더욱 원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비굴한 승리자를 결코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떳떳한 꼴찌에게, 당당한 패배자에게 진전한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중 실패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무수한 실패의 연속선상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때리면 맞았고, 뺏으면 빼앗겼으며, 감옥에 집어넣으면 두말 없이 그 속에 갇혔을 뿐만 아니라 항상 헐벗고 굶주려 초라한 몰골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간디의 인생은 확실한 패배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생의 멋진 승리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의 방향이 옳았고 최후의 결전에서 우렁찬 개선 나팔을 울렸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이기고 또 이긴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왕조 말기에 우리네 대부분이 깊은 역사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으로서,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이완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기고 또 이기기만 계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인생의 승리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완용이라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안일과 출세와 승리를 위해 조국을 팔아먹고 조국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겨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위대한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불의를 끼고 출세를 한들, 권모술수로 부를 축적한들 그것이 자신을 진정한 승리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도주하여 100세까지 장수하며 살은 군인보다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한 어느 무명 용사의 묘비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게 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기회주의자 되어 얕은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승리할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 결과는 언제나 처참한 실패입니다.
차라리 손해보는 것 같고, 미련스럽게 보이고, 우둔한 것 같아도 주의 정의와 사랑을 끝까지 실천하며, 내 생각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 때에 완전한 승리자, 당당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즉 유명한 자, 사는 자, 칭찬을 듣는 자, 부자가 다 승리자가 아니요, 주를 위하여 무명한 자, 죽는 자, 징계를 당하는 자, 가난한 자가 오히려 참된 승리자의 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얻는 것만이 다 승리가 아닙니다. 잃어도 주를 위하여 잃으면 진정한 승리자요, 그러고도 감사할 수 있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금메달을 딴 자가 다 승리자가 아니요, 비록 꼴찌를 했더라도, 명예를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출세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꼴찌의 과정이 떳떳하다면 그는 참으로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땅의 승리만을 바라보다가 하늘나라의 승리를 놓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로 승자와 패자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주를 위하여 멸시를 당했느냐, 누가 주를 위하여 고생을 했느냐, 누가 주를 위하여 자존심이 꾸겨졌느냐, 누가 주를 위하여 희생을 했느냐에 따라서 진정한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분은 가시와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으며, 피를 흘리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패배였습니다. 그 패배 앞에 그를 따랐던 모든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패배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분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자로 칭송하고 있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세상을 이기신 주심, 주님의 그 승리의 모습을 우리가 좇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