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법이 충돌될 때

날짜: 
2012/02/06
설교: 

롬7:21-8:2 두 법이 충돌될 때
컴퓨터로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한번쯤은 겪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시스템 충돌이나 혹은 파일 충돌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충돌이 생길 때에는 그 충돌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만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고 원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서로 충돌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의 초신자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보게 됩니다. 이때 성경 속에 나타나는 진리의 충돌에 매우 당황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 충돌의 문제를 잘 풀게 되면 바른 신앙이 되지만 충돌의 문제를 잘못 풀게 되면 그 신앙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겪는 충돌 중에 이런 충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6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데 그렇게 조용히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실제 어떻게 기도하셨을까요? 히브리서 5:7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 보고는 조용히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왜 정작 예수님은 통곡을 하며 기도를 하는 겁니까? 이상합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에게 금식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경 구절에는 금식하지 말고 배불리 먹으라고도 합니다.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는 가면 금식기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한얼산 기도원에 가면 먹고 힘을 내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 참 왜 이럽니까? 헷갈립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렇게 한 가지 사안을 두고 두 가지로 전혀 다르게 말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서 기도의 경우는 이렇게 그 충돌을 해결하면 됩니다. 아주 다급한 문제가 있어 폭발 직전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조용히 기도하라고 해도 소리를 크게 지르며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히 주님께 기도해야 할 상황에서는 일부러 소리를 지르며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때와 장소,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혹은 자신의 성격에 따라서 기도의 형태를 취하면 됩니다.
특히 금식기도 시에는 자신의 건강을 잘 체크하고 금식을 해야 합니다. 제가 오산리 기도원에 전도사로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금식하러 오시는 분들에게 항상 주의를 주는 사항이 있습니다. 간에 질병이 걸린 사람은 금식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에 제 때에 영양이 공급이 안되면 간은 급격히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장기 금식은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금식한 만큼 죽으로 철저한 보식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귀신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금식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즉시 금식을 멈추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를 해줍니다. 금식기도라는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상반되게 해석을 하고 상반되게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다른 두 가지 해석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충돌로 보이지만 실제는 상호 보완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충돌된 구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과 행함이 구원과 연결이 되면 이 사안은 상당히 예민하고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기독교 정통을 따르고 있는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반드시 출제되는 시험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과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에 대하여 논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사안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는 중에 참으로 놀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라고 구글에 입력하고 뜨는 자료를 보았습니다. 첫 페이지에 뜨는 자료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교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믿음에 관한 말씀들을 잘못 해석한데서 온 크나큰 오류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경 구절을 쭉- 적어 놓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야- 이거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헷갈리겠다. 그리고 꼴깍 넘어가겠다.” 그런데 그 글의 맨 밑에 이런 글자가 있었습니다. -몰몬 메시지- 즉 나는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행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죠.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입니까?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행함의 균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3:18)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행하기를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글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꼴깍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맨 앞에 보니까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정과 건강과 참 신앙을 지키는 월간지 : 살아남는 이들- 여러분, ‘살아남는 이들’이란 이단인 안식교에서 나오는 월간 잡지입니다. 그리고 이 글도 이단성 글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면 그 어떤 목사라도 기독교계에서는 반드시 이단으로 판명됩니다.
그러면 로마서의 믿음과 야고보서의 행함에 관한 기독교의 정통 해석은 어떤 것일까요? 마치 신학교 시험을 치는 것 같이 딱딱하고 지루할 것 같아서 예를 들며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교회에 갔다 와서 두려움에 떨고 울면서 집에 왔습니다. “엄마! 나 어떡해? 나 지옥 간대!” “아니, 누가 너 더러 지옥을 간대?“ ”응- 우리교회 주일 학교 선생님이 그랬어!“ ”아니 뭐야?“
예수님을 믿는 그 부모 집사님은 매우 화가 나서 담임목사님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 아이가 주일학교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놀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바보야!” 그러자 주일학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너 친구에게 바보라고 그랬지? 너 지옥 가!”
그 주일학교 선생님이 왜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말을 했는가 물어보니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5:22에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러분, 자기 자녀에게 혹시 “이 미련퉁이야! 이 바보야!”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참 안됐습니다. 마태복음 5:22 예수님의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말씀에 따라서 당신은 지옥 불에 들어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웬만큼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목사님,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요.” 이에 대한 대답은 조금 후에 하기로 하고 계속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또 주일학교에 갔다 와서 역시 두려움에 떨면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주일학교 선생님이 지옥 간대!” 그 엄마는 “아니 뭐야? 그 선생님이 또 그랬어?” 그 부모 집사님은 더욱 화가 나서 목사님에 가서 따졌습니다. “아니, 목사님, 도대체 그 주일학교 선생님이란 분 왜 그래요? 왜 애들한테 툭하면 지옥 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목사님은 또 그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 아이가 뻔한 거짓말을 선생님에게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요한계시록 21:8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러분, 혹시 거짓말 한적 있습니까? 참 안됐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인 지옥에 가십시오.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이 두 구절만 적용을 하면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을 다 지옥에 떨어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지옥 보내기 쉽지요. 잉-
예수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지옥 간다고 하면 무서워 떨잖아요. 그러니까 이 두 구절만 적당히 사용해도 성경 제대로 모르는 크리스천들 겁주기 쉽습니다. 더구나 이와 비슷한 내용의 행함을 강조한 성경구절들을 가지고 장황하게 설명하면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은 행함이 구원의 조건인양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행함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러나 행함은 우리크리스천들의 덕목이지 구원의 조건이 단 0.00000001%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100%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그 후에 행함이 따르면 금상첨화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란 믿음을 전제로한 행함입니다. 즉 믿고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믿음 따로, 행함 따로 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지만, 그래서 요즘은 행함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은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기독교 정통입니다. 이단이 되지 않으려면 목사도 이렇게 말해야 되고, 성도님들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어디 가서 이단인 것 같다는 소리 듣지 마십시오. 이 동네 굉장히 좁은 동네입니다. 그렇게 몇 마디하고 돌아다니다가는 금방 안좋은 소문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믿음 + 행함. 대단히 좋습니다. 바른 신앙입니다. 크리스천은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설 때 “주님, 제가 주님을 믿어서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 행함도 좋아서 저를 구원시키신 거지요?”라고 말하면 주님이 혹시 이렇게 말하실는지 모릅니다. “너 어느 교회 출신이냐?”
“예- 캘거리순복음중앙교회 출신인데요.“ ”그래, 니네 교회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그 목사 이름이 뭐냐?“ 그때 ”예 김원효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저는 주님에게 대단히 혼이 납니다. ”너 임마, 내가 너를 구원해 준 것이 행함이 올바르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너를 구원해준 것이냐? 아니면 네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의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므로 네 죄를 용서해준 것이냐?“
“아 물론 주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저의 죄를 용서해준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제가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어찌 저의 행실이 옳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개 성도는 내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안하고 자기의 옳은 행실도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느냐? 너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냐?“
여러분, 구원의 조건을 오직 믿음으로만 하면 어찌 좀 값싼 믿음 같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 너무 주님께 죄송합니다. 기왕이면 믿음 + 행함도 있으면 그 구원이 좀더 비싸고 멋있게 보일 텐데 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비싼 구원을 받으면 나도 좀더 우아하고 멋이 있는 크리스천 같이 보일 텐데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것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쉬워서 값이 싸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공짜입니다. 우리는 태양 빛도, 공기도, 부모님 은혜도, 구원도 너무나 쉽게 얻습니다. 그렇게 쉽게 얻는다고 그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공기가 부족해서 당장 숨을 못 쉬고 죽는 사람에게는 다이아몬드 열 트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공기 하나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얻을 때에는 예수님 믿는 믿음 하나면 필요충분조건입니다. 다른 것 필요 없어요. 물론 하늘의 더 많은 상급을 받으려면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마르틴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무리 고행을 하고 행함을 옳게 가지고 살아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비누로 아무리 손을 깨끗이 씻어도 현미경으로 보면 여전히 세균이 우글우글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 성경을 읽으면서 본문의 구절이 들어왔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여러분, 현재 개신교의 모든 교회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바탕 위에 세워졌습니다. 물론 행함으로 구원 받지 않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어찌 보면 좀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것 같지만, 이 교리를 저버리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9)
여러분, 예수님 믿고 순교하기까지 그렇게 옳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사도 바울도 노년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하물며 사도 바울보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금보다도 은보다도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그런데 혹시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 같이 행함이 바르고 착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 주 은혜 놀라와!” 여러분, 잘 믿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좋습니다. 행함이 바르기 위해 우리 모두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행함과 연결시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약해지고 맙니다. 은혜가 은혜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 마땅히 얻어야하는 대가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빚쟁이로 전락시키고 여러분은 예수님 위에서 구원을 내놓으라고 보채는 채권자가 되고 맙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마귀의 고단수 궤계입니다. 예수님을 매우 화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안 좋아집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설교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저는 그분께 저에게 맡겨준 양떼를 잘 돌보았느냐에 대하여 회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입니다. 저는 목자입니다. 영어로 목사를 ‘pastor’라고 하는데 pastor는 목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예수님의)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 양을 주님이 저에게 치라고 해서 치는 것입니다. 제가 양을 잘 치고 잘 먹이면 주님은 저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잘하였도다!‘ 하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저는 성경대로 말씀의 꼴을 먹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도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만약 저의 말씀의 꼴이 성경과 다르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서 다른 교회, 다른 목자에게로 가도 좋습니다. 목사는 여러분과 교리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주님의 말씀처럼 양떼를 먹이고, 양떼를 치며, 그들이 잘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보살피며 축복해주는 사람입니다.
부탁합니다. 교리의 문제는 목사에게 맡겨주십시오. 목사가 전하는 교리가 틀렸다고 계속 주장하면 하면 당신은 여기에 있을 양떼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이 보낸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목자를 따릅니다. 가끔 신앙의 사춘기가 되어 그저 불순종하는 습관이 생긴 것은 괜찮습니다. 저를 한 대 때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비난하면서까지 여기에 있는 것은 불행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목자인 저에게 있어서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도 귀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는 이민 목회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계속 훼손당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될 때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지금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행여나 그런 경우가 생길 때 우리는 친구를 잃는 아픔과 슬픔을 격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설교는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너와 내가 바른 진리 위에서 바르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