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러리 정신

날짜: 
2011/01/10
설교: 

요3:22-30 들러리의 정신
혹시 들러리를 서 보셨습니까? 원래 들러리는, 결혼식을 하면서 신랑이나 신부를 식장으로 인도하고, 옆에서 보살펴 주고 거들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들러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들러리라는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괜히 들러리만 섰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 의미 없이 곁다리 노릇만 했다는 뜻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헛수고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원래 들러리는 그렇게 나쁜 뜻의 단어가 아닙니다. 특히 영어로 풀면 들러리는 Best Ma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풀면 신랑측의 가장 좋은 남자, 혹은 신랑의 가장 좋은 친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주인공인 신랑 옆에 붙어서 신랑을 인도해주고 돌보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친구요, 진정한 들러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주인공인 예수님의 들러리 역할을 하면서, 들러리의 기쁨을 누리며 인생을 마치신 위대한 선지자를 봅니다. 누구지요?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이요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을 쓰신 사도 요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유대의 헤롯왕 때에 태어났습니다. 한 늙은 제사장의 아들로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친족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사촌 내지 육촌쯤 되는 이종형제였습니다. 그가 장성하자 광야에 나가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다만 자신은 뒤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닦는 사람이요, 메시아가 온다고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분이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자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마지막엔 자기의 제자들까지 자기를 떠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질책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얼마 후 죽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게 죽고 맙니다. 헤롯왕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수양딸이 춤을 추어 귀빈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헤롯왕은 그녀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소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서 지금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세례 요한은 머리가 잘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머리는 접시에 담겨서 연회장에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인간적로 보면 그는 아주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그의 일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때까지 "인류 역사상 세례요한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라는 뜻입니다.
분명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들러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깁니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들러리만 잘해도 우리는 위인의 반열에 설 수 있고, 주님께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들러리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주인공만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들러리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들은 주인공처럼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떠나고 관객도 떠난 덩그런 곳에 혼자 남아서 어질러놓은 뒷정리를 묵묵히 청소합니다. 아름다운 들러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칭찬하실 것입니다. "네가 주인공보다 큰 사람이다."
올해 우리는 좋은 들러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들러리가 되고, 교회의 들러리가 되고, 이웃과 사회의 들러리가 되십시다. 들러리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들러리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좋은 들러리가 될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삶과 그 정신을 통해서 그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1. 들러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들러리는 그야말로 들러리일 뿐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랑의 친구가 되어서 그를 돌보고 거들어줘야 하지, 신랑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또 자기 일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 순간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로 우뚝 섰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로 이럴 즈음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몰렸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렸습니다. 예수님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의 주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지게 됐습니다. 여기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3:26)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한창 인기를 누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초라해집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피해의식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경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엔 점잖게 경쟁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엔 파괴적인 경쟁을 하게 되고,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양쪽 다 망하는 걸 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지도자의 됨됨이를 재어 볼 수 있는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한 말의 속뜻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사람들이 다 예수한테로 갑니다. 이전에는 모두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 왔는데, 이젠 선생님보다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습니다. 저희들, 몹시 기분 나쁩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손 좀 써 보세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27절, 28절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 건너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질투할 것도 없고, 시샘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기가 죽을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젠 나대신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의 뜻이니 나는 그분의 들러리로서 만족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덧붙입니까? "이젠 너희들도 저 분을 증거해야 한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분수를 넘는 일에는 관심조차도 갖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자신이 메시야로 착각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매우 큰 인물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갈등이 종종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기가 중심에 서려고 하는데서 기인합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거나 자기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가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욕심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서로가 들러리가 되어서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한다면 문제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 교회에서 서로 들러리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우리는 화목하고 주님께 칭찬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높이며 좋은 들러리 마인드를 가지며 서로 봉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들러리는 신랑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들러리는 신랑은 아니지만, 신랑의 일이 내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해야 들러리로서 자격이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요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노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기쁨이 넘쳤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시자 자신은 초라하게 되었는데도 그는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타나자 나는 초라해졌습니다. 그가 나타나자 나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때 나는 어땠습니까? 그 상황을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나타난 그에 대하여 질투하지 않았습니까? 나타난 그에 대한 험담을 은근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주인공이 되었을 때 나는 슬퍼하며 울지 않았습니까?
부끄러운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사촌지간 혹은 육촌지간입니다. 한국 속담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고 복통을 일으켜야 합니다. 급히 설사를 한 바가지로 쏟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전혀 배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칭찬할 만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전도 받아서 교회에 오면 예수님이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신랑이 신부가 왔다고 기뻐하는데 들러리가 신부를 보면서 "뭐 저딴 것이 왔어?" 하고 신부를 비난하면 안됩니다. 들러리는 신랑과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들러리로서 본분을 잊어버리고, 그 기쁨에 동참하기는커녕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서야 어찌 좋은 들러리가 되겠습니까?
들러리의 마음은 신랑 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것입니다. 그가 기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게도 기쁨이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들러리요, 신랑의 가장 좋은 친구의 모습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는 들러리로서 이런 신랑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들러리는 신랑은 흥하고 자기는 쇠해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들러리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신랑과 한 마음이 돼서 기뻐하는 것 뿐 아니라, 나아가서 신랑을 위해서라면 자기는 얼마든지 작아져도 좋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0절에 보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랬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그는 더 커져야 하겠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선언을 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들러리의 모습입니다. 너와 내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위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모습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흥하고 높아지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망해도 좋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기가 쇠하기를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과연 누가 바른 사람입니까? 과연 누가 진정으로 큰 자입니까?
전에 어떤 잡지에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뭐냐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2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제1 바이올린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제2 바이올린 연주자는 상대적으로 빛이 안 나고 영향력도 작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전체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입장으로 봐서는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제2바이올린, 즉 들러리 역할을 하는 이가 언제나 필요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들러리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들러립니다. 들러리는 주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들러리는 친구를 위해 한없이 작아져야 합니다. 신랑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는 들러리 정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들러리 정신을 가집시다. 그렇게 겸손히 올 한 해를 산다면, 올 연말엔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 모두가 놀랍도록 성장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들러리 정신으로 우리 교회와 우리 각자가 주님께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