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날짜: 
2017/03/26
말씀: 
눅12:6-7
말씀구절: 

...

설교: 

미국의 어느 세미나 강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지갑 속에 있는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었습니다. 마치 은행에서 갓 찍어낸 듯이 빳빳한 신권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100달러짜리 지폐입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시는 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미국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솔직하고도 적극적으로 잘 표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세미나 강사는 갑자기 그 새 돈을 양손에 쥐고서는 마구잡이로 구겨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그 구겨진 돈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서 또다시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렇게 구겨진 돈이라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모두가 또다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세미나 강사는 그 구겨진 돈을 바닥에 던지더니, 자기의 구둣발로 몇 번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이제 그 지폐는 먼지가 잔뜩 묻어서 아주 지저분해졌습니다. 세미나 강사는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지폐가 이렇게 더러워졌는데도, 그래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디 한 번 손들어보십시오."
청중들은 역시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세미나 강사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이 100달러 지폐가 아무리 구겨지고 짓밟혀졌어도 여러분이 이 돈을 그래도 원하시는 이유는 이 돈의 가치가 상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실패로 인해서 구겨지기도 했고, 때로는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짓밟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서 우리의 가치 자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나간 자기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 때때로 쓰러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때때로 죄로 인해서 자신의 모습이 얼룩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겉모습이 깨끗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건 무척 맘에 안들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당신의 가치가 돈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일 달러?(무슨 소리! 너 죽고 싶냐?) 십 달러?(천만에! 만만에!) 백 달러?(너 농담 하냐?), 천 달러?(흥! 체!), 만 달러?(에게!), 십만 달러?(그것도 모자라!), 백만 달러?(응...그것 같고 안돼!), 천만 달러?(생각 좀 해보고!) 일억 달러(1100억)?(글세...) 백억 달러(11조)?(응- 그 정도는 되지 않겠어!)
그러면 너 지금 백억 달러 줄께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어?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분들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일 번, “글쎄, 생각 좀 해 보고! 아무래도 안되겠는데!” 이 번, “그 정도 돈을 받고 아프지만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삼 번, “오케이, 11조원이면 당장 죽을 수 있다.” 사 번,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내 생명과 영혼은 바꿀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성경의 대답은 몇 번입니까? 예, 사 번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가치를 굉장히 낮게 평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을 듣다 보면 주님께 이런 반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주님, 천하보다 귀한 사람을 참새보다 귀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지혜롭지 못하게 하십니까? 참 마음에 안 드네요.”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참새의 가치가 얼마나 하신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앗사리온은 로마의 화폐로서 노동자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의 1/16이 됩니다. 여기 캐나다 화폐로 환산해서 노동자가 하루 100불을 번다고 하면 한 앗사리온은 6불 25센트가 됩니다. 즉 6불 25센트에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습니다. 물론 GST를 합쳐야 합니다.
그런데 두 앗사리온 즉 12불 50센트 + GST를 내면 참새 한 마리를 덤으로 받아서 다섯 마리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새 한 마리는 3불정도 밖에 안합니다. 더구나 인건비 빼고, 중간 마진 빼고,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참 새 한 마리의 가격은 대충 One Dollar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의 가치가 하나에 One Dollar하는 참새보다는 귀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나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하고 자기를 굉장히 비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하면 어떻습니까? “아무개야,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너는 참새보다 더 가치가 있단다.”
아마 이 말을 들으면 상대방이 열 좀 받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할는지 모릅니다. “뭐야- 내가 참새보다 귀하다고? 그럼 내가 참새보다 귀하지 않냐? 너 죽을래?” 이렇게 열 받고 화를 내는 사람에게 또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을 해 보십시오. “응- 내 말뜻은 참새 한 마리가 아니고, 참새 다섯 마리, 아니 많은 참새보다 네가 더 귀하다는 거야?”
아마 이렇게 말을 해도 상대방은 화가 누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다혈질 여성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 뺨을 맞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단지 많은 참새보다는 귀하지만 많은 독수리보다는 값이 안나간다는 말씀입니까? 혹은 우리가 많은 새들보다는 귀하지만 많은 다이아몬드보다는 값이 덜 나간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 달러 밖에 안되는 참새처럼 그렇게 가치 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가치가 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너희들을 어찌 잊어버리겠느냐는 반문이 아닙니까? 즉 너희처럼 가치 있는 사람들을 어찌 하나님이 잊어버리겠느냐, 너희는 머리털까지도 하나님이 다 기억할 정도로 귀중하게 보신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신체 중에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나 입이나 귀나 팔 다리 손발보다는 아무래도 머리털이 가치가 덜 나가지 않겠습니까? 손과 팔 다리는 한번 잘라지면 다시 생기지 않지만, 머리털은 여러 번 잘라져도 다시 자라나지 않습니까? 물론 대머리 같은 사람은 예외지만 그래도 손과 팔 다리 잘라지는 것보다는 머리털이 잘라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이렇게 잘라지면 또 나는 우리의 머리털조차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시고 세신 다니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번 자신의 신체를 세어 보십시오. 눈은 몇 개지요?(두 개) 입은 몇 개지요?(한 개) 귀는 몇 개지요?(두 개) 코는 몇 개지요?(한 개) 머리털은 몇 개지요?(묵묵...) 여러분 중에 혹시 자신의 머리털이 몇 개인지 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 제가 이전에 할 일은 없고, 너무나 따분해서 제 머리털을 한번 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몇 개이던가요?“ ”예, 1,234,567개이던데요.“ 이런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계산한 그것이 100% 정확히 맞았습니까? 당신이 머리털을 세신 것보다 하나님이 세신 것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지 머리털조차도 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밀하게 완벽하게 우리를 보살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머리털을 다 세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세시고 있습니다.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은 나의 심장의 박동 수도 체크하시고 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계산하시고 있고, 시력도 얼마인지 살피시고 있고, 내가 나이가 먹어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인지를 다 살피시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살피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할 일이 없고 따분해서 저와 여러분의 머리털을 세시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가 많은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즉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가치 있고, 너무나 사랑스러워 이렇게 살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에게 있어서 당신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앗사리온의 문제가 아니요, 데나리온의 문제가 아니요, 달러의 문제가 아니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억 달러(11조원) 보다도, 그리고 이 온 우주보다도 저와 여러분을 더 가치 있게 보십니다.
이 온 세상은 다 없어져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당신은 오직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인생이 환난과 문제로 말미암아 심히 구겨졌다 할지라도, 죄로 인해 심히 더러워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참새보다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는지 모릅니다. 혹 어떤 사람은 당신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할는지 모릅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당신을 향하여 제발 지구를 떠나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속 살아있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계속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너무나 귀중한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당신이 축복을 받고 오늘도 기쁘고 보람 있게 인생을 사는 것은 당신의 꿈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보다, 당신의 가족보다, 당신이 더 잘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러분, 어쩌면 인간의 모습은 참새와 같이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리저리 몇 번 하늘을 날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땅에 떨어져 싸늘하게 죽어야만 합니다. 죽어서 호화로운 무덤을 쓰던지, 아니면 바다로 쓸려져 그 시체가 바다의 고기밥이 되든지, 혹은 불에 태워져 한 줌의 가루가 되든지 간에 인생은 너무도 헛되고 헛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헛되게 죽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일까요?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참새처럼 한 앗사리온에 가치 없이 팔리고, 참새처럼 불쌍히 죽는 것을 원하시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있고,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축복 속에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인 천국을 예비해 놓으시고 있고, 이 땅에서도 천국의 맛을 보여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사랑 속에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이러한 축복과 행복과 사랑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복잡하게 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지식으로 우리를 피곤케하는 학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요,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하여, 나의 불행 너의 불행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고로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행복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나를 가장 소중히 생각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떠난다면 우리의 가치는 참새보다 못하게 되고 맙니다.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도 예수님 안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나를 가장 귀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 앞에 도달하기까지 최선을 다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