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날짜: 
2010/08/09
설교: 

막:16-17-18 목사님,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더욱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인구의 25%가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75%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불신자의 숫자가 더욱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여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도, 그리고 여기 캐나다에 온 목적도 내가 먼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들도 하나님을 잘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어찌하여 믿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믿음이란 귀한 선물을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이 그냥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믿으라고 윽박질러서 믿게 되었습니까? 혹은 하나님이 믿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해서 겁먹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마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어느 기독교 언론에서 한국의 유명 인사들의 간증문을 연재로 실었습니다. 그 제목이 저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그 간증문이 재미있어 읽어보았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게 된 이유와 동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저의 아버님 어머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저의 집 바로 앞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양천구 목동 사거리에 있는 대흥장로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저의 어머님, 누님, 여동생, 그리고 제가 다녔습니다. 아버님은 이북 출신이라 당시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신 영락장로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는 하면서도 "과연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가끔 들었습니다. 이런 의심이 생기면 "아이구, 내가 이러면 안되지!" 의심아, 물러가라." 하고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였습니다. 건축업을 하시는 아버님이 충청도 아산에서 피아노 공장의 터를 닦는 작업을 하실 때였습니다. 제가 용돈도 벌 겸 방학 때에 그곳에 가서 보조 감독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터가 예사스런 곳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그곳이 옛날 고려 시대 때에 고려장을 했던 야산이라고 합니다. 혹시 고려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잠시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고려 시대 때에 한국에 양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되면 일도 못하고 양식만 축낸다고 해서 자녀들이 자기의 부모님을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에다 버려야 하는 국법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악법입니다. 저희가 공장을 세우려고 한 곳이 바로 옛날 고려장을 했던 야산이었습니다. 그 산을 깎아 평평하게 정지작업을 하는 중 옛날 고려장을 했던 밥그릇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버릴 때 마지막으로 밥을 그릇에 담아서 부모님이 그 밥을 마지막으로 드시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역사입니다. 가난에 찌든 조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늙은 부모가 깊은 산중에 내버려졌습니다. 그 당시 산에 호랑이도 있었고, 늑대도 있었고, 각종 사나운 짐승들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구름 사이로 달이 듭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워우--- 야산에 버려진 늙은 부모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상상에 맡깁니다. 즉 그 산은 원한과 눈물이 서린 곳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그 산에서 여러 사람들이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산에 귀신이 나온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그 산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야, 귀신아, 한 번 나에게 나타나봐라. 한 번 구경 좀 하자."
저는 그 당시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경에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잘 믿지 못했습니다. "에이, 20세기에 무슨 귀신이냐? 성경에 웬 전설의 고향이냐?" 하고 귀신의 존재를 불신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존재인 귀신을 믿지 못하다 보니 역시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믿는 하나님은 그냥 우리 마음에 좋은 마음이 생기면 그 좋은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며, 나쁜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 나쁜 생각 자체가 귀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영적 존재가 나름대로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바람과 같이 인격체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성경에 예수님이 귀신에게 "너 언제부터 이 사람에게 들어갔느냐? 귀신아, 이 사람에게서 나와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람들에게 신령하게 보이려고 쇼를 하시는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야산에서 저에게 귀신의 존재가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불도저가 고장이 났습니다. 저녁을 먹고 불도저를 고치려고 기사와 함께 불도저 위에 올라가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손전등을 비춰주고 기사는 불도저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오른쪽 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당신이 여기 주인이오." "네?" 하고 제가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보자 옛날 치마저고리를 입은 늙은 할머니의 상체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손전등을 비추자 곧 바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기사님에게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어머님에게 하니까 저의 어머님이 "귀신이 너에게 나타난 모양이다." 하시면서 공사장인 그 야산에서 십자가를 땅에 그으며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기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귀신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불도저 기사에게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예상보다 작업 속도가 늦어져 밤에도 불도저 기사가 번갈아가며 철야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야산의 흙을 절벽 밑으로 메우는 작업이었습니다. 혹시 불도저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면 죽게 되고 맙니다. 깊은 밤중에 야산에서 혼자 작업을 해야 하였기에 담력이 상당히 센 기사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불도저 위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머리를 헤치고 불도저 바퀴 위에 나타났습니다. 마치 귀신 영화에 나타난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불도저 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잃지 않고 라이터와 손전등을 켜면서 이리저리 귀신을 피해 다녔습니다. 작업하는 야산과 마을과의 거리가 도보로 약 30분가량 거리가 있었기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갈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 동이 트자 귀신은 사라졌습니다. 기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마을로 내려 왔습니다. 귀신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장에 가보니 밤새 작업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불도저 바퀴 자국만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또 땅에다가 십자가를 긋고 "사망 귀신아, 저주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기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저는 이 귀신 사건으로 인해 "어, 귀신이 있긴 있는 모양이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도 사실인가 보네. 그럼 뭐야? 귀신이란 영적 존재가 있다면 하나님이란 영적 존재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좀더 성경을 공부하면서 귀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귀신이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떠돌아다니는 영혼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가 하나님께 반역을 하여 쫓겨난 존재이며, 그 귀신들이 죽은 사람의 탈을 쓰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나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귀신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불쌍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죄로 우리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귀신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들은 귀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귀신을 물리치고 쫓아낼 권세가 있습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주위에 누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어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누리고 영생과 천국을 얻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귀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쫓아내십시오. 우리들을 죄에 빠지게 하고, 타락하게 하며, 하나님과 멀리하게 하는 귀신들을 쫓아내십시오.
이 땅에는 우리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귀신도 있고, 하나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불행하게 하는 귀신들을 쫓아내며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며 전하는 귀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