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이냐? 보답이냐?

날짜: 
2007/06/30
설교: 

계3:8 배신이냐? 보답이냐?
옛날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자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를 악으로 갚는다.”라고 합니다. 즉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보답은커녕 해를 끼치고 배반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관련된 노래가 있습니다. 한국의 50대 정도의 나이에 드신 분들이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바람기 많은 중년들이 춤추는 곳인 카바레에 가면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은 ‘배호’라고 합니다. 자, 이 노래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예- ‘배신자’라고 하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혹시 이 노래 가사를 아시는 분이 여기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소개를 할까요.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짓밟아놓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을까.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와 아주 정반대의 노래도 있습니다. 다름 아닌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혹시 이 노래의 가사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 노래의 가사도 잠시 소개를 할까요?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네.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 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배신자’와 ‘일편단심 민들레야‘라는 두 노래를 듣다 보면 아무래도 배신자가 되기보다는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너무나도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는데 여기 캐나다 땅에 와서 그 은혜의 배신자가 되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여기 있는 분들은 신앙의 배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아니,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일편단심 민들레야‘ 하고 처량한 노래를 불러....아이, 재수 없다. 밥 맛 떨어진다.”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말세입니다. 즉 일편단심 민들레가 귀한 시대요, 배신자가 많이 생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보면 말세는 배신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세에는 정치인들도 쉽게 배신하며 자기의 당을 떠나 철새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기업인들도 쉽게 배신하여 자기가 속한 회사의 기밀을 타 회사에 누출합니다. 아내와 남편도 배신하여 너무도 쉽게 바람을 피웁니다. 학생들도 배신하여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을 존경하기 보다는 스승을 향하여 욕을 합니다. 자녀들도 배신하여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거역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배신하여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
어느덧 말세에는 제 때에 배신을 잘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요, 수단과 수완이 좋은 실력 있는 사람들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정의고 불의고 간에 그러한 배신이 성공하면 영웅 취급을 받습니다. 도대체 말세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잘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관이 혼란됩니다. 그것도 단체로 배신을 하면서 자기를 더욱 정당화 시키려고 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배신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더구나 겉으로는 미소를 짓다가 하루아침에 쉽게 배신하는 사람은 소름이 끼치도록 싫습니다. 저는 그렇게 세상적으로 약삭빠른 사람보다 정직한 바보를 더욱 좋아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 중에서 대체로 누구를 더 좋아합니까? 개를 더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는 주인을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마음에 안들면 주인을 향하여도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처를 냅니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개를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즉 개에게는 일편단심 민들레의 속성이 있고, 고양이에게는 배신자의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배신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저하게 배신한 가룟 유다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예수님을 잠시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는 다시 회개시켜 제자로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배신의 모습이 깊어지기 전에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계속하여 배신자로 있으면서 적당히 눈치를 보면 나중에는 회개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맙니다.
말세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어서 고통의 시대가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은혜는 더욱 많이 부어져도,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배신하기 때문에 고통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그 놀라운 사랑을 배신하면 우리가 어찌 감히 성도라고 이 땅에서 떳떳이 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3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여기 캐나다에 오기 전에 외국어 학원에서 호주출신인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제가 목사인 것을 알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무엇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그 질문에 저는 “은 30냥에 팔았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 이런 대답이 한국 성도님들의 보통 대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성도님들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키스로!”
여러분, 중동 지방에서 키스로 하는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존경의 인사법입니다. 서양에서도 종종 키스로 인사를 합니다. 이도 역시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호감의 인사법입니다. 프렌치 키스는 좀 예외이지요. 그런데 이 키스를 가지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사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가룟 유다는 말합니다. “내가 키스하는 사람이 예수이니까 그 사람을 잡으라.” 이렇게 미리 짜고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다가와 살며시 키스를 하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키스와 배신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 키스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칼을 들이댄 것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속이고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급 배신입니다. 더욱 많은 은혜를 받은 자가 더욱 치밀하게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도를 배신하는 자에게 이런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잠15:10)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습1:6)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스8:22)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배신한 백성, 배신한 아내로 비유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안타깝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32:6)
여러분, 이 말씀과 대조적인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같이 읽어 보십시다.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
이 말씀은 주님이 초대교회 당시 소아시아의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능력, 적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배신하지 않고 일편단심 끝까지 잘 지키었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소아시아의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배신한 교회로서 주님께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큰 은혜를 받고도 주님을 쉽게 배신하는 신앙의 배신자입니까? 아니면 적은 은혜를 받고도 주님께 일편단심 충성하는 분이십니까? 신앙의 위인인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그리고 찬송가 40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계속 사랑을 받거나, 계속 인정을 받거나, 계속 존경을 받거나, 계속 귀중히 여김을 받고 있을 동안은 잘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덜 사랑을 받는다거나, 덜 인정을 받는다거나, 자신이 좀 무시를 당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끊어지면 그때 종종 배신을 합니다. 너무도 타락한 인간적인 모습에 “아- 인간이 과연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하고 때로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 나도 주님으로부터 그 큰 은혜를 받고, 그 큰 사랑과 그 큰 능력을 받았는데 나도 지금 혹시 배신자의 모습이 아닌가?”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과연 나는 얼마나 귀한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캐나다 땅에 와서 그 은혜에 배신하는 모습에 빠져 있습니까? 이전에는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했건만 지금은 바쁘다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준배신자의 모습은 혹시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소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죽을 때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은혜를 보답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