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아 너는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날짜: 
2010/12/20
설교: 

눅2:1-20 베들레헴아 너는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미 500년 전 미가라는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원래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가 사는 동네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가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의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만삭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호적을 하러 고향 베들레헴에 가다가 예수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로마 황제도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라 성서지도에 나옵니다만 실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나오지도 않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이나 여리고나 나사렛 같은 도시에는 축도 못 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왜 만인의 구세주로 오시는 위대하신 분이 예루살렘 수도도 아니고 이런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지난 주일에 그 이유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오신 것은 사망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것을 크게 들어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원수의 목을 꺾으시고 영원토록 왕으로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하, 작은 마을에서도 큰 인물이 나올 수 있구나!" 특히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요 성군인 다윗 왕이 탄생한 마을입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 또한 평화의 왕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작은 나도, 너도, 우리도 들어 사용하실 수 있다는 깨달음이 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관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숙소를 찾지 못해 외양간에 머물러 있는 예수님의 가족을 보고 있습니다. 그 냄새나고 더러운 외양간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제대로 누우실 공간도 없어서 말 여물통인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이분이 누굽니까? 만인의 구세주이십니다. 만왕의 왕입니다.
이런 위대한 분이 이렇게 초라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보잘 것 없이 천하게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마구간에 오셨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분이 자라나신 곳은 빈민촌인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목수라고 하는 그 분의 직업과 죽음의 겉모습만 보면 그 분은 실패자요,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외모 역시 요즘 한국말로 하면 짱이 아닌 꽝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외모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아마 외모 지상주의에 길들여진 요즘의 한국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예수님은 아마 한없이 멸시와 무시를 당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외모로 사람을 본다면 총각 예수님은 일등 신랑감 순위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처녀들이 많지만 신랑감을 고를 때 현재의 외적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면 아무 처녀도 예수님과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프러포즈를 하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며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보기에 초라하게 보인다고 그 사람이 정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버드 대학 정문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이런 성경 글귀가 정문에 붙여있는 사연은 이렇습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노년의 부부가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으로 하버드 대학을 찾았습니다. 그 노부부는 다름 아닌 스탠포드대학 설립자인 릴랜드 스탠포드 부부였습니다. 스탠포드는 서부의 금광과 철도업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고, 캘리포니아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버드대학을 찾은 연유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스탠포드 주니어가 15살의 어린나이에 장티푸스에 걸려죽자 후사가 없게 된 스탠포드는 당시부터 명문대학이었던 하버드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버드대학 총장실 앞을 지키고 있던 수위가 이들 부부의 옷차림이 허름한 것을 보고는 불친절하게 대하며 용건을 물었습니다. 총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고 수위는 코웃음을 치며 그럴 수는 없다고 대꾸했습니다. 기분이 상한 부부는 이런 대학을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지만 그래도 수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총장을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스탠포드부부는 기부할 생각을 버리고 대신 재단을 설립해 대학을 하나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885년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고 말하면서 스탠포드재단을 설립해 전 재산을 대학설립에 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대학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 대학이 오늘날 미국에서 명문대로 불리는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당시 릴랜드 스탠포드가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기부한 재산이 현재의 시가로 환산하면 약4억불(약 1조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은 '자유주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학교 모토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중요시하며 젊은 층에 인기 있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언제나 하버드대학을 제치고 지원자 대비 합격률이 가장 낮은 대학 1위를 기록하는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미국에서 IT산업의 산실이 된 실리콘벨리를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우 아쉬워했지만 이미 때는 물 건너갔습니다. 그 이후부터 하버드 대학의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글귀가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므로 1조원을 날릴 수도 있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초라한 분이 어찌 메시아입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외양간에서 나신 분이 있습니까? 태어날 때 포대기가 없어서 붕대 같은 천으로 둘둘 말려서 짐승의 밥통에 누웠던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부모님이 객지를 여행하시다 이름 없는 여인숙, 그것도 짐승들이 있는 헛간에서 여러분을 나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당시 유대지역을 다스린 분봉왕 헤롯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도 율법사도 아니었습니다. 여관집 주인도 아니었습니다. 언뜻 동방박사라고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동방박사보다도 더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지경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의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천한 직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하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무식해서 율법을 읽을 수도 없는 그런 비천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천사들에게 구세주 탄생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 땅이 더운 지역이기는 하지만 12월의 추운 날씨에 어떻게 양을 칠 수 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0월이 넘어가면 목자들은 추운 날씨로 인해 양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한 겨울에, 그것도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이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왜 철도 아닌데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을까요?
철도 아닌데 예루살렘 근방에서 양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당국자들의 부탁을 받고, 제사에 쓰일 흠 없는 양을 키우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목자들이 구세주 탄생의 굿 뉴스를 들은 것입니다.
또한 이 목자들은 일생의 단 한번 있을까 말까한 신비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목자들이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얼마나 신비했을까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기들에게 천사가 나타난 겁니다. 어쩌면 이때까지 목자들은 열등감에 빠져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살기는 살지만, 기쁨이 없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살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나니까 자기들끼리 말합니다. "베들레헴까지 가 보자" "주께서 이루신 일을 보러 가자" 그리고는 지체 없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가서 외양간 구유에 놓여있는 아기 예수님을 봅니다.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이 모습을 보고 목자들의 마음이 실망감에 빠졌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보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닐 것 같은 겉모습을 보고도 믿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자기들 같은 사람에게도 천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더 희망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천한 모습이 자기들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뒤이어 온 동방박사들처럼 귀한 예물을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들은 가장 큰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모님에게 자기들이 보고 들은 광경을 다 고한 것입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0-13)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때까지도 요셉과 마리아는 불안한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자기들에게도 천사가 나타나서 얘기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목자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아기가 정말 구세주시구나. 정말 천사의 말씀대로 이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구나" 하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가 있는데, 사실 가장 큰 선물은 뭐겠습니까? 희망과 용기의 말입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좋은 선물은 마음에 기쁨이 생기게 하는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목자들의 선물이 그랬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선물을 아기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이 목자들로부터 구세주이심을 고백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선물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사역하시면서도 이런 고백을 듣기는 정말 드물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이런 고백을 예수님은 들으신 겁니다. 예수님께도, 부모님에게도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 헨리의 단편집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했는데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와서 서로 선물을 해야 할 텐데 선물 살 돈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의 금발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아름다운 빗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차고 있던 시계를 전당잡혀 빗을 샀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선물로 그가 차고 있는 시계의 낡은 줄 대신 새 시계 줄을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자기 머리를 잘라서 팔아서 그 돈으로 시계줄을 샀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선물은 빗과 시계줄이었는데, 찰 시계가 없고 빗을 머리가 없으니 그 선물들은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이나 아기 예수님이나 목자들이나 겉보기에는 다 작고 보잘 것 없고 천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 나오셨습니다. 어쩌면 나와 너는 그리고 우리는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열등감은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작은 것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여러분, 약해 보이고 작게 보이는 것이 곧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더 낮추고, 우리 힘이 약해지도록 우리를 비우면 하나님께서는 더 강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아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추운 외양간 구유에 누워계셨습니다. 외모도 백그라운드도 보잘 것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작고 보잘 것 없고, 천해 보이는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메시아였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작고 연약하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인해 스스로 열등감 속에 사로잡혀 우울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동네 베들레헴, 작은 외양간에서 보잘 것 없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면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니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희망의 성탄이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넘쳐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승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