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승리한다.

날짜: 
2019/04/21
말씀: 
요11:25-26
말씀구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설교: 

부활절이 가까이 오면 제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목사님, 성탄절은 매년 12월 25일 날자가 똑같은데 왜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다릅니까?”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부활절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전후인 초봄에 지켰습니다. 그 후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린 주후 325년부터는 3월22일-4월25일 사이 만월(보름) 다음에 오는 첫 주일을 부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볼까요? 기원전 1046-기원전 256년 사이에 중국에는 주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농경사회였기에 날씨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달이 지구를 도는 것을 계산하여 만든 음력만 가지고는 날씨가 정확히 안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하여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을 계산하여 만든 양력을 도입했습니다. 즉 지구가 태양을 한 번 도는 일 년을 24등분으로 나누어 명칭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24절기입니다. 아마 요즘은 24절기를 다 외우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그만합시다. 머리 복잡해집니다. 이러한 명칭은 중국 황하 지역을 중심으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한국이나 다른 지역의 날씨하고는 잘 맞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24절기를 음력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24절기는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양력입니다.
이 24 절기 중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가 춘분입니다. 대개 춘분은 3월 21일(혹은 하루 전인 3월 20일이나 하루 후인 3월 22일)입니다. 이 춘분 바로 후에 나타나는 만월(음력 보름달, 음력 15일) 후의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부활절은 3월 22일-4월 25일 사이에 정해지지만 매년 날짜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아휴- 복잡해! 제가 괜히 복잡한 것을 가르치고 있나요?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어느 이슬람교도가 기독교를 깔보며 한 크리스천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카에 가면 우리 교주님인 마호메트의 무덤을 볼 수 있지만 너희들의 교주인 예수의 무덤은 없지 않는가?” 그러자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이슬람교의 교주인 모하멧의 시신은 아라비아 메다니 시의 한 관에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공자, 맹자, 석가도 다 무덤이 있고, 김일성, 모택동의 시신도 관속에 누워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저도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서 확인해 보았더니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부활 장면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의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아이의 혼을 돌아오게 하소서.”(왕상17:21) 그러자 죽은 아이의 혼이 돌아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의 시체 위에 올라타고 그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눈을 뜨고 살아났습니다.(왕하4:35) 그리고 죽은 자들의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그들이 살아났습니다.(왕하13:21) 예수님도 여러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말씀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 아들의 관을 붙잡고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 그러자 죽은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또한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막5:41) 그러자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욥바에 다비다라고 하는 과부의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행9:40)하고 외치니 그녀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의 부활은 또 다시 언젠가는 썩을 몸으로,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추위와 더위의 고통도 당하는 육의 몸으로, 그리고 속되고 더러운 죄의 몸, 추한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는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즉 이전 사람들의 부활은 불완전한 부활이요 불완전한 승리였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부활이요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패배자에 불과하며 기독교는 패배한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교회가 존재하고 부흥되는 비결은 바로 교회 안에 예수님의 부활의 영, 승리의 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란서 볼테르라는 사람은 당시 “50년만 지나면 교회는 이 땅에서 없어진다. 하나님은 죽었다. 성경은 거짓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후에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없다고 무신론적인 책을 찍어내던 그 집에는 온통 마루부터 천장까지 꽉 차도록 성경을 찍어내는 기독교 인쇄소가 되었고 교회는 더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독교에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영, 승리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아 목마르다.” 하시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비참하게 죽으실 때에는 사망의 권세가 생명의 능력을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덤 문을 박차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대한 찬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단은 “이제 우리가 이겼다.”고 비웃고 조롱했지만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사단은 패배자로 전락하고 예수님은 위대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는 죄악이 승리한 것 같았고 공의의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결국 공의가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 때 잠시 동안은 죄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불의한 자가 더 잘사는 것 같고, 악한 자가 더 번창해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최후 승리는 공의를 좇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기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다가 잠시 패배자가 되는 것 같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부활의 힘이 있기에 결국은 승리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4:8-9) “주 예수를 부활시키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부활시키리라.”(고후4:14)
본문에도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사느니라.”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당신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단의 공격을 심하게 받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리저리 문제가 터지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승리합니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승리를 확증시켜주는 부활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리의 개가를 불렀기에 그의 몸이 되는 교회도 주님과 더불어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슬픔으로 울지 마십시오. 당신에겐 더 큰 기쁨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저주로 인하여 안타까워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에겐 더 큰 축복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또한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겐 더 큰 평안과 행복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부활의 능력이 있기에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사옵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또한 너와 나의 부활도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 하에서도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부활은 간교한 유대인에 대한 승리요, 포악한 로마 군인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정치적 궤계에 사로잡힌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요, 사단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가난과 저주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슬픔과 불안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는 바로 그를 믿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래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넉넉히 이겼노라.” 여러분, 부탁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더 이상 낙심하지 마십시오. 패배자의 슬픔의 탄식도 거두어들이십시오. 그리고 담대히 외치십시오. “또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승리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