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이냐 형통이냐 ?

날짜: 
2004/04/19
설교: 

창39:1-6 불통이냐 형통이냐 ?
여러분, 혹시 이런 어려운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 '궁인지사번역파비(窮人之事飜亦破鼻)' 어려운 한자어이지만 쉽게 설명하면 "안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뜻입니다. 즉 모든 일에 형통은커녕 재수 없는 일, 불통의 일들이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잘되는 사람은 넘어져도 산삼뿌리 앞에 넘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이래저래 일이 형통하게 잘 풀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외국 땅에 살면서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잘 풀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영어 공부를 비롯해 모든 배우는 일에 형통하기를 원하고 있고, 직업을 갖거나 사업을 하는 분들은 직장과 사업장이 형통하게 잘 되기를 원하고 있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분들도 집안의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잘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형통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고, 하늘나라를 가꾸는 일에도 형통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국어 사전을 보니 '형통'이라는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형통이란 그저 근심 걱정 없이 편하게 먹고사는 것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써 아버지께 무척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보통 옷을 입었지만 요셉은 아름다운 채색 옷을 입었고, 형들은 양을 치며 노동을 했지만 요셉은 아버지 품에서 사랑을 받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께 특별 계시를 받아 자신이 형들보다 더욱 높아지는 꿈도 꾸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어렸을 적부터 이래저래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에 보니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더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Joseph was well-built and handsome."입니다. 즉 얼굴도 잘 생겼고, 몸도 보기가 아주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2절에도 보면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3절에도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형통했다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success in everything, success in whatever he did."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지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요셉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범사에 형통하였더라"라는 말에 심한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아니 어찌 보면 그는 범사에 붙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상당히 재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나 심한 고난을 당한 사람이요, 너무나 억울한 모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는 17살에 아버지 심부름을 갔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를 당해 노예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인 마나님의 성적 유혹을 뿌리치다가 도리어 강간범으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수년간 옥살이를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노예로 팔린 상태에서, 그리고 죄수로 전락한 상태에서 형통해 보았자 그것은 형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 차라리 노예로 팔리지 않고, 죄인의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는 것이 형통이지 않습니까 ?
즉 사람이 보는 형통의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형통의 관점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를 하거나 출세를 하면 형통했다고 말을 합니다. 즉 649 복권이나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굉장히 재수가 좋고 형통 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복권의 끝자리가 맞지 않아 꽝, 즉 영어로 nothing이 되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며 불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형통은 육신의 삶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형통한 것이고, 돈이 적어지면 불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잘 다니는 직장에서 잘리면 크게 불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근심하며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보는 형통의 관점이라면 요셉은 결코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형통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좋은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중에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이 모진 핍박과 환난을 겪고 심지어 심한 악형을 받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놓고 볼 때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환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큰 영광이요, 귀중한 형통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단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단지 고통의 면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고통 후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요셉의 생애 중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은 참으로 귀하고 유익한 삶이요,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목사님들 중에는 이전에 폐병에 걸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랬고, 조용기 목사님이 그랬고, 여러 유명한 목사님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그렇게 병에 걸렸을 당시에는 자신은 억세게도 재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었고 '왜 나는 이렇게 불통할까 ?' 하고 자신의 인생을 후회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통의 일, 재수 없는 일, 내 뜻대로 안되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치료도 받고, 구원도 받고, 능력도 받고, 더욱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형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러한 심한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모두 형통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와도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으면 그것은 바로 형통의 사건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은 시련이 다가와도 그것을 큰 형통의 사건으로 보고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한 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되면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까 ? 아니면 내 뜻대로 안되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까 ? 도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형통의 관점은 어떤 것입니까 ? 원하건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형통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하늘의 형통을 좇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분이 자녀들 교육을 잘 시켜 보겠다고 뉴욕으로 이민을 갔었습니다. 5년 동안 부인과 함께 하루에 14시간씩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여 가게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돈도 제법 벌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그를 성공했다며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을 열심히 버는 사이에 고등학교 2학년 딸은 가출을 해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학교를 자주 결석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불면증과 관절염으로 시달리게 되니, 벌어 놓은 돈도 서서히 다 까먹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잘 길러 보겠다고 이민 가서 열심히,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결국 교육도 망치고, 자신의 건강도 망치고, 남는 것은 병밖에 없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돈만 번다고 인생이 형통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환경이 좋다고 자녀교육이 잘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큰 형통이요, 가장 큰 축복이지 않습니까 ?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건들, 그리고 어려운 시련들, 혹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삶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형통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형통함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형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노예의 신분이 되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성경은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성경은 그를 형통의 사람이라고 거듭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큰 불행인 것 같았고, 가장 큰 불통의 사건인 것 같았고, 사단에게 패하신 것 같았지만 그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기에 십자가 사건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부활을 주는 인류 최대의 형통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성공과 형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공과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형통이요, 크리스천의 성공과 번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형통한 삶이요, 성공의 삶이요, 최대의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곳 외국 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번민에 빠지고,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짜증이 나거나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하나님 안에 있다면, 결국 그 일도 합력하여 형통의 사건이 되고 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그들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에 어떠한 일들이 발생했습니까 ? 아무 문제없이 모든 일이 순탄하고 형통했습니까 ? 오히려 물이 떨어져 갈증에 허덕이게 되었고, 양식도 모자라게 되었고, 고기도 먹지 못했고, 적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불통스런 일들이 생겨나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 보니 그러한 문제, 그러한 고난, 그러한 불통의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형통을 끌어내는 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 즉 인간이 보는 형통의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형통의 관점은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지금 당장 힘이 들면 불통이라고 생각하고 불평하며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지금의 그 어려운 일들조차 형통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요셉을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그의 길이 단지 고생이 없고 순탄했기에 형통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형통을 보십시오. 그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에 그는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 보니 그 길은 로마를 전도할 수 있는 행운의 길이요, 형통의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가는 길에 탔던 배가 파선을 당하고 맙니다. 배가 깨지고,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멜리데라는 섬에서 보블리오 추장의 딸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즉 불행이라고, 불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좋은 섬김의 기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바울의 삶은 꼬이고 복잡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즉 고통 가운데서 더 잘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도인인 우리들의 형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악인의 형통을 보고 괜히 부러워하거나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형통한 것 같으나 나중에는 결국 불통이요 실패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인생은 불통인 것 같아도 잠시 후에는 큰 형통이요 성공이요 행복입니다. 부디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형통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