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표현

날짜: 
2011/11/05
설교: 

요14:15-21 사랑의 표현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귀한 사랑을 우리에게 말로,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선물로 표현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제목으로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3. 시간을 같이 보냄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같이 있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서 이야기 하고, 여기 저기 여행도 하고, 영화구경도 하며, 같이 맛있는 것도 사먹습니다. 때로는 놀이공원도 같이 갑니다. 그리고 아쉽지만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집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집에까지 바래다줍니다. 그리고 집 앞에서 그냥 헤어지기 싫어 또 다시 동네에 있는 경양식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금 제가 누구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저와 우리 집사람 데이트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제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성인 교구 전도사였습니다. 교구 식구들은 제가 처음 부임하자 "전도사님, 결혼하셨지요?" 하고 묻습니다. 노처녀 딸을 가지신 권사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좀 늦게 하니까 어떤 분이 대신 대답합니다. "에이, 결혼하셨으니까 성인교구에 오셨겠지요. 결혼안하셨으면 성인교구에 오셨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잘생긴 전도사님이 이제까지 결혼을 안하셨겠어요." 그러는 겁니다. 제가 그 말을 기분이 좋아서 가만히 있으니까 그때부터 저는 결혼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결혼한 사람으로 교구에서 2년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우리 집사람 만나서 결혼한다고 하니까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렇게 결혼 사실을 알리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구 예배와 심방 중에 권사님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전도사님, 여기 교구 일은 저희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전도사님은 일찍 가서 사모님 되실 분과 데이트하세요." 제가 괜찮다고 괜찮다고 해도 자기들이 내 마음을 잘 안다고 하면서 계속 일찍 가라고 떠미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까요? 자기들도 사랑을 해봐서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게 시간을 같이 보내다가 나중에는 매일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동거를 합니까? 결혼을 합니까? 요즘은 결혼식 하기도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어가니 그냥 동거하시는 분이 있는데 적극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리고 싶습니다. 말려도 안될 정도로 진도가 나갔습니까? 가능한 빨리 결혼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11시에 만나요 부라보 콘!" 이게 뭐지요? 주일예배입니다. 예배는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있고 싶다고 데이트 약속을 한 시간입니다. 고로 예배는 따분한 시간 죽이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달콤합니다. 예배는 재미있습니다. 예배는 상쾌합니다. 그렇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아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제대로 성립이 안되면 예배 시간은 지루합니다. 따분합니다. 졸립습니다. 어떻게든지 늦게 가서 일찍 나오고 싶습니다. 예배 중에도 자꾸 딴 생각이 들고, 시계를 쳐다봅니다. 그 마음 제가 잘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나마 하나님과의 데이트를 펑크 내지 않고 나왔다는 것만 해도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박수 한 번 쳐주십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아니,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승천하셨다는데 어떻게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있으면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우리 각자와 항상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있으면 한국과 캐나다에는 동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 난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늘 같이 있고 싶고, 늘 곁에서 지켜주고 싶은데 육체가 제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기막힌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육체가 아닌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파가 존재하는 것처럼 확실히 인격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합니다. 왜 우리와 함께 합니까? 나를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정복하고 나를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위해 변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지켜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그러느냐고요? 아- 철부지 같은 질문을 계속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뭐지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단 일초도 떠나지 않고 항상 같이 있고 싶으려면 내 안에 들어오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해도 화장실에 응가하러 갈 때에는 같이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오면 언제든지 항상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잠자는 순간에도 나를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고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같이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늘 같이 있고 싶습니다. 성령님으로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아무쪼록 사랑하는 주님과 늘 같이 함으로 세상을 이기시고, 주님과 사랑의 나눔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4. 헌신과 봉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심하게 냄새나는 자녀의 똥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 똥도 많이 쌌네!" 그리고 아이를 위해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합니다. 왜 그럽니까? 그 아이가 커서 나에게 큰 효도를 할 줄 알고 미리 저축해 놓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헌신과 봉사는 비단 사람에게서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사랑은 반드시 헌신과 붕사와 희생으로 표현이 되고 증명이 됩니다. 지난 주 저희 집사람이 교회 식사 당번이었습니다. 200명이 먹을 국이나 찌게를 준비하는 것이 여성 혼자서는 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저의 경우 아들도 없고, 딸은 밴쿠버에 있고, 당연히 제가 도와줘야 합니다. 무거운 것도 들어주고 조수 노릇을 하면서 두부도 쓸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여, 성도님들이 이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로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저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교회를 사랑하기에 음식 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수고를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 참 힘듭니다. 애들 수준에 맞게 말씀을 소화시켜서, 그들 수준에 맞게 재미있게 표현을 해줘야 합니다. 그것도 매주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사랑을 연결시키기 위해 차량 봉사도 하고, 시설관리와 청소도 하고, 기도 봉사도 하고, 말동무도 되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연히 따르는 수고입니다. 사랑에는 수고 즉 노동이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때로는 큰 희생도 감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독생자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신 것입니다. 너와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데 너와 내가 큰 죄를 졌습니다. 그 죄로 인해 인생을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너와 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희생으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비로소 참 평안과 참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주여- 이 큰 은혜,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주여-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까요? 따뜻한 말, 친절한 말, 진심된 말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선물로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간을 같이 보냄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헌신과 수고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조그만 몸짓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들은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그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조건은 사랑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가족간의 사랑도, 친구간의 사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고서 사랑을 안다고 감히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서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감히 유식한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얻지 못하고서 '나는 행복하다!'고 감히 말하지 마십시오. 진짜 사랑의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얻지 못하고서 '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노라.'고 스스로 자아도취하지 마십시오.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인생은 제대로 산 것이 아닙니다. 참 바보처럼 산 것입니다. 허무와 고독 속에서 산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산 인생은 Nothing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여기는 얼마나 황무한 곳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곳에서의 삶은 또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안전합니다. 평안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 마음이 심히 초조해집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을 놓치면 마치 어린아이가 낮선 곳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것과 같습니다. 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정신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강력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저 하늘과, 저 떠도는 구름은 우리에게 그 분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그토록 사랑하노라."
그 분의 사랑의 음성이 들리기에 이곳 캐나다가 참으로 살기 좋은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캘거리에 그 분의 사랑의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기에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의 보살핌과 수고가 있기에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그 사랑을 힘껏 전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전하면서 더욱 그 사랑을 맛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시는 그 분의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분의 사랑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