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여!

날짜: 
2011/10/22
설교: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어느 교회의 여성 집사님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아들을 부를 때에 늘 이렇게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머니가 아들을 그렇게 사랑스럽게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제가 그 집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아들을 부를 때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부르는 것이 너무도 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대답합니다. "목사님, 제가요, 이전에는 아들을 그렇게 안불렀어요." "그래요? 이전에는 어떻게 불렀는데요?" ' 이 빌어먹을 놈아! 이 원수 같은 놈아! 이 우라질 놈아! 이 거지 같은 놈아! 이 때려죽일 놈아! 이 염병할 놈아!'라고 불렀어요. 그런데요, 하루는 하나님이 저에게 책망을 하셨어요."
"사랑하는 딸아! 너는 왜 아들을 그렇게 부르느냐? 자식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기업을 그렇게 저주하면 되겠느냐?" "하나님, 그러면 어떻게 부를까요?" "방금 내가 너를 뭐라고 불렀느냐?" "예- '사랑하는 딸아!'라고 부르셨잖아요." "그래 맞다. 내가 너를 그렇게 부른 것 같이 너도 아들을 그렇게 불러라."
"목사님, 그때부터 제가 깨닫고 아들을 부를 때에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들을 부를 때 '이 우라질 놈아! 이 때려죽일 놈아! 이 염병할 놈아! 이 문둥이 같은 놈아!" 하고 부를 때에는 아들이 엄마한테 오기를 꺼려하고 눈치만 살살 보더니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부르니까 엄마를 가까이 하고, 엄마에게 의논도 하고 친해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들을 부를 때에 뭐라고 불렀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여러분을 부를 때에 이렇게 부르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겠느냐? 지옥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
제가 만약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부르면 여러분은 대단히 기분이 좋으시겠지요? 굉장히 행복하겠지요? 그렇게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부르면 아멘 소리가 우렁차게 나오겠지요? 그리고 '아- 우리 목사님 요즘 메시지가 굉장히 힘이 있어. 우리 목사님 꼭 선지가 같아. 나 오늘 굉장히 은혜 받았어. 회개해야지!'라고 말하겠습니까?
노우, 아닙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니, 목사님이 오늘 왜 그런다냐? 혹시 오늘 아침에 식사하시다가 목에 가시가 박혔나? 아니면 오늘 교회 오시기 전에 사모님하고 싸우셨나? 아마 오늘 기분이 안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우리보고 화풀이야? 우리가 뭐 목사님 화풀이하는 심심풀이 땅콩이야 뭐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목사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에 이렇게 부릅니다.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할렐루야! 이때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한다고요?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나요, 살살 거짓말도 잘하고요. 또 남 비난도 얼마나 잘하는데요. 그리고 하나님도 모르게 죄지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는 것은 진짜 저를 몰라서 그래요. 아마 하나님이 나를 진짜로 안다면 '이 독사의 새끼야!'라고 부르지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기 싫을 걸요?"
이때 하나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합니다. "애야, 나는 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사랑한단다. 그리고 생각해 보아라. 내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느냐?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에게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해놓고 어찌 내가 너를 미워하겠느냐? 비록 네가 죄를 지었어도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단다. 오히려 네가 죄를 짓고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너를 더욱 불쌍히 여긴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고로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실 때에 이렇게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물론 하나님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때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우르릉 쾅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중 잣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러주기를 원하고 있지만, 내가 싫어하는 자에게는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불러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자를 향하여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면 하나님께 따지고 싶습니다. "아니, 하나님, 그 사람 못된 사람이에요. 그렇게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못돼요."
요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요나에게 앗수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요나 선지자가 화가 났습니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런 악인을, 그런 죄인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싫다고 배 밑창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 속 좁은 요 나에게, 요 너에게, 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도 사랑하신다." 그것이 바로 요나서의 주제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입니다. 그 빚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도 빼앗기고 자기도 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인생 끝장났습니다. 그러나 채주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풀려나서 길에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빚진 자의 멱살을 붙잡고 '이놈! 이 죽일 놈! 이 못된 놈! 이 독사의 자식!' 하며 그를 관원에 끌고 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채주가 '아니, 나는 저를 불쌍히 여겨 일만 달란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건만 저는 일백 데나리온 밖에 빚을 지지 않은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다니!' 하며 한숨을 짓고 화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큰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고, 그를 향해 '사랑하는 자여!'라고 불러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빚을 갚는 겁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옆에 분에게 그렇게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혹시 겉으로 말은 '사랑하는 자여!' 하지만 속으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자여!'라고 말하지는 않으셨는가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 번 더 진심으로 옆에 분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사랑하는 자여!"
그리고 혹시 옆에 청년 형제자매가 같이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사랑하는 자여!'라고 한 말을 행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만약 오해하면 어떤 일이 생기지요? "형제님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 중에, 많은 증인들 앞에서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니 책임지세요." 이러면 될까요? 안될까요? 어떨 때는 되고, 어떨 때는 안됩니다.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 못나도 사랑합니다. 키가 작아도 사랑합니다. 코가 납작해도 사랑합니다. 황금 이빨이 없어도 사랑합니다. 빈털터리라면 더욱 사랑합니다. 왕따라면 더욱 사랑합니다. 과부와 홀아비와 고아라면 더욱 사랑합니다. 특히 이 외국 땅에서 홀로 된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더욱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는 제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저는 젊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는 하기가 참 쉽습니다.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그런 설교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하면 내가 무슨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설교를 하고 나면 나는 더욱 의로워진 것 같고, 기분이 좋습니다. 속이 후련해집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립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를 들으면 성도님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마음이 무겁습니다. 얼굴이 굳어집니다. 집에 가서 또 부부싸움 합니다. 부부간에 공의에 대한 설교를 들었으니 공의의 잣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그러니 그 결과는 또 싸움입니다. 그러나 부부간에 공의로 바라보지 말고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바라볼 때 철부지 딸처럼 바라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볼 때 코흘리개 아들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원수 같은 아내, 원수 같은 남편도 '에고, 불쌍한 내 새끼!' 하고 껴않아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승화입니다. 너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여전히 사랑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결혼해서 자녀를 길러보신 분들은 알 겁니다. 자녀가 칠칠맞고 못돼먹어 때로는 화가 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부모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이러한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시10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를 때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는 것이 많을까요? '저주받을 자여!'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많을까요? 물론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많이 강조되었기에 종종 '저주받을 자여!'라는 내용이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죄를 책망하고 질타하면서 '저주받을 자여!'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신약은 많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자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납니까? 그 이유는 바로 관점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죄가 청산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지간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죄는 완전히 용서되고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은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저주 받을 자가 아니라, 지옥가고 심판 받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사랑하는 자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어- 너 예수님 믿고 또 죄를 짓고, 또 담배 피고, 또 술 마시고, 또 도박하고, 또 음란하고... 그것도 습관적으로 의지적으로 계속 죄를 지었으니 너는 지금부터 저주받을 자다. 앞으로 나랑 관께 끊자. 이 나쁜 놈아!'라고 말을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에 일흔 번 곱하기 일곱 번 니코르(=) 490번까지, 혹은 그 이상 죄를 지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여!'라고 다정하게 부릅니다. '왜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철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부모이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부모라면 자녀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지 '저주받을 자여!'라고 부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아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Unconditional Love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면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하나님처럼 사랑이 아니라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다 이야기 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보다 더 귀한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당신의 그 크고, 그 깊고, 그 넓은 사랑을 잘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깨달음을 주세요.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감동시켜주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하나님의 종으로서 전달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