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날짜: 
2007/07/15
설교: 

행20:22-24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하루는 하나님께서 닭과 개와 돼지를 불러 명령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열심히 봉사하다가 올라오너라."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 닭과 개와 돼지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각각 보고를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닭이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시간을 몰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꼬끼오!'하며 새벽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쁘셔서 닭의 머리 위에다 아름다운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닭은 상으로 받게 된 아름다운 벼슬을 항상 자랑하며 흔들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 개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도적이 많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만 이상한 사람이 보여도 '멍멍!'하며 힘껏 짖음으로 집을 지켜 주었습니다."
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당시 3개의 다리를 가진 개에게 다리 하나를 더 주었습니다. 다리 하나를 선물로 받은 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네 번째 다리가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에 용변을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하사 받은 다리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꼭 다리 하나를 들고 용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돼지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먹고 자고 놀다가 왔습니다. "돼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저 돼지의 주둥이를 단칼에 쳐라." 그리하여 한 천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돼지주둥이를 칼로 딱 잘라버렸습니다. 그 결과 돼지의 주둥이가 없어지게 되어 돼지는 코와 입이 붙어서 하나가 되었고, 그 결과 돼지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숨이 막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자신의 코와 입이 붙어 있음으로 해서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한 가지 거짓 풍설을 퍼뜨렸습니다. “돼지 머리를 제사상에 올려놓으면 복 받는다.” 그랬더니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을 받겠다고 돼지 머리를 잘라서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넙죽넙죽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올려진 돼지는 자기 앞에서 넙죽넙죽 절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에 너무 웃음이 나서 오늘도 제사상에서 방긋방긋 웃음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웃음을 주기 위하여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닭은 닭으로써, 개는 개로써,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닭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꼬끼오!'하고 새벽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개는 '멍멍멍!' 짖으며 도둑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셨는지요? 여러분들도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다가 왔다고 고백할 것인지요? 혹시 돼지처럼 자신의 사명을 깨닫지 전혀 못하고 “그냥 자다가 먹다가 놀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은 안계실는지요?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하루는 주인이 타국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면서 그 종들을 불러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종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다른 종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겨주면서 떠났습니다. 그러자 금 다섯 달란트와 금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금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금을 땅에다 파묻어 놓고 전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금 다섯 달란트와 금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에게 나아와 고백했습니다. “주인님, 여기 보십시오. 우리가 주인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기분이 좋아서 두 종들을 칭찬하며 말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그리고 금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에게 나아와 고백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무서워서 당신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여기 당신 것 두 달란트 있으니 도로 가져가시지요.” 그러자 주인이 화가 나서 말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올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으리라.” 여러분,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들도 인생이 끝나는 날, 혹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시는 날, 자신의 한 일에 대하여 상급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따를 것이요, 자신의 사명을 감당치 않은 사람에게는 책망과 함께 재미없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기 캐나다에서도 과연 그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버드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시아계 학생 중 열 명의 낙제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한국계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이들이 낙제를 했는가?“ 그 낙제의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 낙제생들도 고등학교 때에는 공부를 제법 잘 한다고 해서 하버드 대학에 입학은 했는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자 그만 낙심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 잠언서 29: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사명과 목적과 비전이 없으면 방황하고 죄를 짓다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사단이 우리들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에 큰 문제나 핍박을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큰 문제나 핍박을 가하면 도리어 하나님께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도리어 우리들에게 안락과 평안함을 주므로 사명감을 떨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사명감을 잃어버리면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명을 통하여 자신이 이 땅에 왜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 즉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삶의 목적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명을 마치면 나는 나에게 사명을 주신 분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로 사명에 불타는 신앙인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는 신앙인은 열심을 냅니다. 사명이 있는 신앙인은 하루하루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건축하려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의 국민교육헌장이 생각납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와 같은 사명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저와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해야 합니까? 각자가 자신의 사명에 대한 고백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사명에서부터 출발하고, 사명을 위해서 살다가, 사명이 마치는 날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죽는 날이 언제냐고 물으신다면 사명이 끝나는 날이라고 말하겠어요.
미켈란젤로에게는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14살인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보톨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예, 제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된다. 먼저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보톨도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스승님, 술집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네요."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이 조각을 술집을 위해 사용했다."
보톨도는 다시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거대한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품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였고, 다른 하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쓰였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어디에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각자의 사명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분명 일치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주님께 받은 분명한 사명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사명에 매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명을 마치기 위하여 생명까지 포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무엇에 매임을 받았습니까? 혹시 이 세상의 안락과 쾌락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데에 매임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도대체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바치며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는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는 것을 일생일대의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 때문에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반면 그 사명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불러주시고, 자신에게 이런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 사명을 받은 자는 다릅니다. 사명은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사명자는 눈빛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사명자의 가슴에는 솟구치는 정열이 있습니다. 사명자는 환경을 초월합니다. 사명자는 죽음까지 초월합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한 날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님에게 태어나는 육신적인 출생이요, 두 번째는 우리의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 주신 사명을 위하여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태어나는 것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사명을 위하여 사는 인생은 보람찬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살다가 하늘나라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로서의 칭찬과 상급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