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도

날짜: 
2010/10/25
설교: 

사42:1-4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도
혹시 상한 갈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갈대란 연약합니다. 아무도 갈대를 가지고 건축 재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갈대는 조그만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조그만 힘에도 꺾어지기 쉽습니다. 더구나 그 연약한 갈대가 심히 상했습니다. 이제는 가만히 나두어도 혼자 얼마 버티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상한 갈대는 꽃꽂이로도 쓰일 수가 없습니다. 그냥 꺾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갈대는 종종 연약한 인생을 표현하는데 쓰이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의 육체도 100년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 바이러스와 세균에도 굴복하고 맙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심령도 연약합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사자나 호랑이가 덤비면 머리털이 곤두서며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아주 강한 심령을 가진 사람도 종종 너무도 쉽게 그 심령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꺼져가는 등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등잔에다 감람유 기름을 붓고, 실로 꽈서 만든 심지를 그 기름등잔 속에다 넣어서 불을 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충 40년 전에 '남포'라고 하는 등잔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등잔이든 남포든 간에 계속해서 기름이 공급되어야만 불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기름이 다 소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심지 자체가 타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심지에서 그을음과 연기가 모락모락 납니다. 그을음은 방을 더럽힙니다. 여기저기 검은 때가 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방에 좋지 못한 냄새를 피옵니다. 또한 연기로 인해 눈이 맵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주인은 당장 일어나서 그 등불을 끄게 됩니다. 즉 꺼져가는 등불이란 주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함과 피해를 줍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들을 쓸모없다고 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한 갈대의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셔서 갈대피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슬리고 손상된 심지 같은 우리들을 내버리시는 게 아니라, 새롭게 고쳐서, 거기에 감람나무 기름과 같은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밝혀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로 나아 온 사람들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도 고쳐서 제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창녀도 강도도 못됐다고 버리지 않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두어 들이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저주 받았다고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문둥병자나 혈루병자들도 더럽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깨끗이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었고, 고상한 가문이나 권력이나 재물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가셨습니다. 주님은 세 번씩이나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들어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돌멩이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군중에게서 그녀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한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브라질 시골의 작은 마을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엄마와 크리스티나라고 하는 딸이었는데, 아버지는 크리스티나가 어릴 때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 마리아는 파출부를 하면서 홀로 크리스티나를 키웠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크리스티나가 틴에이저가 됐습니다. 예쁜 크리스티나에게 많은 남자들이 따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크리스티나는 점점 시골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남들처럼 큰 도시에서 화려하게 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 크리스티나를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세상에는 도둑놈과 사기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듣지 않습니다. 엄마는 갈수록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크리스티나가 혼자 대도시에 가서 산다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도 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유흥가로 흘러 들어가서 몸도 마음도 다 망치게 되리라는 것을 엄마는 알고도 남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 마리아가 눈을 떠보니 딸이 없어졌습니다. 딸이 가출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즉시로 딸을 뒤쫓아서 대도시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내리자마자 사진을 수백 장 복사했습니다. 그리고 리오 데 자네이로의 모든 술집, 호텔, 나이트클럽 등을 찾아서 그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호텔 게시판에, 화장실 거울에, 전화박스에, 로비의 한 구석에... 하여튼 눈에 잘 띄는 데면 어디든지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진 뒤에다가는 짧은 메모를 써 놓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어머니 마리아는 돈도 사진도 다 떨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골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주 후, 딸 크리스티나가 어느 건물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맘속엔 두려움과 고통뿐이었습니다. 웃음도 사라졌고, 전에 품었던 화려한 꿈은 모두 악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휘황찬란한 도시에서 안정되고 풍요롭게 살고 싶었지만, 이젠 모두 허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층계를 다 내려왔는데 로비 거울에 사진 한 장이 붙여져 있었습니다.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자세히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다름 아닌 자기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긴장하면서 그 사진을 떼서 뒤를 봤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써져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든지, 너의 지금이 어찌 되었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빨리 돌아오렴. 엄마가" 그 사진과 글을 읽고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흘리며 곧장 어머니가 있는 시골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두 모녀는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찌 보면 삼류 소설이나 삼류 영화에서 나오는 참 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특이한 감동을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보통 엄마들은 이때 집나간 딸의 사진을 붙여 놓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보면 좀 알려달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엄마 마리아는 딸 대신에 자기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기 딸을 부끄럽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대신 자기의 얼굴을 팝니다. 딸을 지극히 배려하고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이 거기 있었습니다.
또 하나 감동받는 것은, 그 사진에다가 자기 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크리스티나야! 빨리 돌아와라!" 그렇게 썼을 텐데 그 엄마는 자기 딸의 이름을 빼버렸습니다. 자기 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 자기 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지금도 한국 신문에 보면 가끔 이런 광고가 납니다. 자녀의 얼굴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어놓고 "순자야! 모든 것을 용서할테니 어서 돌아와라. 네가 좋아하는 아이폰 사놨다."
물론 이런 광고는 효율 면에서는 최고겠지만 그 당사자는 뭐가 됩니까? 친구들한테 얼마나 쪽팔리겠어요? 아마 친구의 조롱을 평생 받을는지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크리스티나의 엄마인 마리아의 마음이 더욱 은혜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사42:2-3)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이름과 죄목을 크게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길거리에 붙인 것입니다. 혼자 조용히 속삭이면서 거리마다 당신의 얼굴을 붙이고 다니신 겁니다. 도망자 얼굴 위에, 사기꾼 사진 위에, 강도와 도둑의 사진 위에 자기의 얼굴을 붙이신 겁니다. 그분이 공생애 3년 동안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얼굴을 이스라엘 구석구석 붙이신 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진이 싫어서 찢어버리면 그 다음날 또 갖다 붙였습니다.
언제까지 그 일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붙어 있어야 할 그 곳에, 예수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 대신 붙이시고,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죽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신 것입니다. 정작 붙어 있어야 할 창녀와 범죄자와 사형수의 사진은 보이지 않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얼굴만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수치함으로 팔리는 대신 당신의 얼굴을 파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가 가려 준 그 모든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공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상한 갈대입니다.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쓰디쓴 추억도 있습니다. 또한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남에게 별 도움이 못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버려두면 다 말라서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되살려 주시고, 우리를 다시 활활 타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둘째, 우리 갈대들끼리 서로 얽히지 말아야 합니다. 갈대끼리 얽히면 갈대는 더 상하게 됩니다. 얽힐수록 시들게 되고, 시간이 더 가면 누가 꺾지 않아도 죽게 됩니다.
셋째, 다른 갈대가 내게 와서 상하게 하려고 하면 그냥 피하십시오. 그 갈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람의 잘못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저 갈대가 나를 상하게 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 얽히지 않습니다. 혹시 그 와중에 약간의 상처를 받더라도 그냥 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그 성능 좋은 건망증을 이때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여러분들도 상한 갈대라도 꺾지 마십시오. 상한 갈대일수록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심지를 돋우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