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를 보는 사람

날짜: 
2004/05/30
설교: 

눅17:33 손해를 보는 사람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집에서 기르는 모든 가축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제 며칠 후에 있을 결혼잔치에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그러자 동물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찬성입니다 !"
모두가 찬성을 하자 주인이 거위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잔치에는 거위요리가 좋겠어 !" 이 말에 거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대답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에게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차라리 조그만 알을 낳는 저 암탉을 잡으시지요." 그 말을 들은 암탉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급히 말을 합니다. "주인님, 저는 매일 아침마다 주인님에게 시간을 알려주잖아요. 저보다는 차라리 양을 잡으시지요."
이 말을 들은 양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에게 따뜻한 털을 제공한답니다. 저보다는 차라리 말고기는 어떤가요 ?" 이 말을 들은 말은 길길이 뛰면서 말을 합니다. "주인님, 여행가실 때 누가 주인님을 태워줍니까 ? 제가 아닙니까 ? 그러니 저보다는 저 암소가 어떻습니까 ? 뭐니뭐니해도 잔치에는 암소고기가 최고이지 않습니까 ?"
그러자 이번에는 암소가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아니- 주인님, 주인님을 위해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 이렇게 열심히 주인님을 위해서 일하는 나를 잡다니요 ? 말도 안됩니다." 즉 모든 동물들이 잔치를 베푸는 것에는 동의를 했지만 정작 잔치에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희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암탉 한 마리하고 돼지 한 마리가 사이 좋게 같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을 가다가 어느 마을에 도착을 했는데, 그 마을에 수해가 났는지 확성기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러분, 수해로 인해 양식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양식을 나누어줍시다."
이 소리를 들은 암탉이 돼지를 보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돼지야, 우리 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좀 주지 않을래 ? 햄과 에그 후라이로 말이야 ?" 이 말을 들은 돼지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야, 너는 계란 하나 낳으면 되지만 나한테는 햄을 내놓으라니 ? 그러면 나보고 죽으라는 것 아니냐 ? 정 네가 양식을 주겠다면 삼계탕과 돼지갈비를 주자고 해야지 ! 그러면 너의 제안에 내가 동의를 하마."
결국 암탉과 돼지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감정이 극도로 상하여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즉 무엇을 외치고 남에게 이야기만 했지 정작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손해보지 않는 것을 전제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손해와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말과 계획은 도리어 계획을 망치고 감정만 상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남에게 지기보다는 이기려고만 합니다. 왜냐하면 지는 것은 실패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왜냐하면 낮아지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두가 가지려고만 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보다 적게 갖고 손해보는 것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분명히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을 이기는 법을 배우고 자랐습니다. 부모들로부터 "기죽지 말라. 져서는 안된다 !"라고 배워왔습니다. 학교에서 등수가 떨어지면 부모에게 혼났기 때문에 친구들보다 내가 앞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친구들도 나의 경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겉으론 '친구야-' 하지만 그 친구가 성적이 떨어지므로 나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각박한 도시생활을 통해 나의 권리와 영역만을 쟁취하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이런 잘못된 교육 환경 속에서 자라다보니 좋지 못한 권모술수만 늘고, 남을 위해 내가 낮아지고, 희생을 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고방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상대방을 통해 내가 무엇인가 유익을 보려는 마음에서 결혼 배우자를 고릅니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오히려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이혼을 합니다. 또한 대학을 들어가는 것도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가 하나라도 남보다 더 가져야 되겠다는 욕심의 발로에서 대학을 들어가려고 합니다. 심지어 신학교를 졸업하여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아니라, 신학교 나와서 목사가 되면 명예도 얻고 부유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극이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투쟁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남을 이겨야하는 경쟁이 아니라 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숨을 얻는 자는 잃고, 잃는 자는 얻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사나운 자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경쟁에 익숙한 우리에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결이며 진정으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왕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종으로 오셨습니다. 영광대신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높아짐 대신 낮아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결국 모든 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죄를 정복하셨고, 악을 이기셨습니다. 겸손으로 영광을 얻으셨고, 죽음으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천국의 방정식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 진짜 성숙한 사람, 진짜 강한 사람, 진짜로 높은 사람은 버리는 사람이요, 손해보는 사람이요,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사회든지, 국가든지, 교회든지 간에 손해보려는 사람이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반면 손해보려는 사람이 없고 모두 이익만 취하려고 하면 그곳에는 진정한 사랑과 화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손해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믿음이 크면 그에 따라 큰 손해도 감당하는 것이고, 믿음이 적으면 작은 손해 밖에는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는 손해를 보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손해보며 사는 것이 정상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마음에 다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손해보며 살자 ! 이왕 손해보는 삶을 살 바엔 웃으면서 손해를 보자. !"
여러분,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 자기는 손해보지 않고 어떻게든지 이익만 취하려는 이기적인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 그런 이기적인 사람을 친구로, 애인으로, 남편과 아내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 우리 교회의 성도님 한사람 한사람이 그러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 아니면 손해를 볼 줄 아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해를 볼 줄 아는 참다운 용기를 가르치셨습니다. 고로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손해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까 ?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마음 드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모든 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손해를 보면 볼수록 우리에게는 기쁨이 더욱 생기게 되고, 더욱 큰 유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가장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에게 늘 손해를 끼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면 인생을
가장 보람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남을 위해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요, 참다운 강자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살펴보면 다 손해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득권을 다 포기하였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조카 롯과 목초지 때문에 갈등이 생겼을 때, 그는 조카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름진 평야는 조카가 차지하고 자기는 척박한 산지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그렇게 손해를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 땅의 티끌과 같이 많은 자손과 보이는 모든 땅을 후손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구약시대 최고의 인물인 모세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즉 모세는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수모 받는 것을 선택하는, 한 마디로 엄청나게 손해보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은 손해보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손해가 그냥 손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면 하늘나라에서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성경은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손해보는 것이 없다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얻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영, 거룩한 영은 손해를 자원하는 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어 진정 성령을 받았다면 그 마음 속에 남을 위해 손해를 보며 희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통하여 하늘나라를 가꿀 수 있는 참다운 능력과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늘나라는 손해를 보려고 하고 희생을 하려고 하는 사람을 통하여 가꾸어지게 됩니다.
손해를 볼 줄 아는 것이 참다운 능력이요, 진정한 용기입니다. 반면 손해가 수반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손해가 없는 믿음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손해가 없는 인내는 야심이요, 손해가 없는 기쁨은 세상 쾌락이요, 손해가 없이 평화를 외치는 것은 위선이요, 손해가 없이 자비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사기 행각이요, 손해가 없이 충성이란 단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기독교인은 가짜입니다.
구약에서는 예배를 가리켜 영어로 sacrifice, 즉 희생이라고 합니다. 즉 희생과 손해가 있어야 예배가 성립이 된다는 것입니다. 손해가 없고 희생이 없는 예배는 형식과 절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희생 없는 제사, 손해가 수반되지 않는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 손해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날 한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관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버스 안에 있는 관광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고개를 막 넘어가려던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습니다.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눈동자에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곳의 급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치달았고, 그제야 눈을 비벼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 길 한 곳, 두 곳을 잘 운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이젠 마을길을 지나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 차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아이들이 길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울려 피하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그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 살인자 !" 하며 그 운전사에게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사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품에 고개를 묻고는 아이를 안은 채 흐느끼며 옆의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쫓아가면서까지 "살인자 ! 살인자 !" 하며 그 운전사를 향해 야유를 했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 그만둬요. 소리 지르지 말아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셨습니다.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손해가 있었기에 구원이 시작되었고, 그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손해보는 마음과 행동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