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가 먼저냐? 영광이 먼저냐?

날짜: 
2022/08/13
말씀: 
히12:2
말씀구절: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설교: 

여러분 각자는 인생을 살면서 몇 번 쯤은 수치와 모욕과 창피를 당해보셨을 겁니다. 어떤 경우가 가장 수치스러운가요? 젊은 남녀의 경우 내가 상대방에게 용기를 내어서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사귀자고 했는데 냉정하게 거절을 당하면 좀 수치스럽지 않을까요? 워낙 얼굴이 두꺼워서 괜찮습니까? 그런 것은 이미 초월하며 살고 있습니까?

학생의 경우 공부를 못하면 좀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담임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주면서 모든 학생들에게 각자의 등수를 공개하면서 나눠주었습니다. 등수가 좋으면 괜찮은데 등수가 뒤에서 1, 2등 하면 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폭로를 당하면 심한 수치심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도 제가 잘 압니다. 사람마다 성격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그만 일에도 수치심을 잘 느끼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수치심은커녕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수치심으로 인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어떤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자기가 잘했다고 빡빡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캐나다에 살다 보면 많이 느끼는 수치심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영어를 잘 못해서 캐나다인과 아주 기본적인 소통도 안 되면 좀 수치스럽습니다.

특히 저는 영문과를 나왔는데도 어떤 경우는 갑자기 영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저 멍- 때리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아주 바보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하면 아- 뭐야! 야- 김원효! 너 왜 그런 기초 영어도 못하냐? 아- 쪽팔려! 나는 네가 싫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혹 어떤 분은 옛날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이유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 만나기도 싫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잘못과 허물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고로 옛날의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용서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고로 과거의 일, 어제의 일로 쓸데없이 수치심에 빠지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진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

예수님은 죽으실 때 하필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신21:23) 고로 사람들은 십자가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도 저주하신 아주 못된 악인인 줄 알고 마음껏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더구나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이 입은 팬티까지 서로 갖겠다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팬티까지 벗겨지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아- 한국에서는 공중목욕탕에 가면 모두 발가벗고 벌거숭이로 목욕을 하는 문화이니까 “그게 뭐가 그리 큰 수치냐?”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옷을 입고 있는데 자신만 강제로 발가벗겨진 것입니다. 그것도 여자들을 포함해 모두가 보는 공중 앞에서 그런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셨으니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애들 말로 하면 “아 쪽팔려!”입니다.

그래서 당시 십자가는 모욕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당시 크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본인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그런 수치를 당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각자 수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직도 수치스러운 분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나 예수님 믿는다. 나 교회 다닌다.”고 떳떳이 말을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요즘 우리 교회는 전도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겠다고 결단도 하고, 하나님께 전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러운 분이 과연 전도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못할 겁니다. 즉 전도를 하려면 가장 먼저 수치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 믿는 것이 전혀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도리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아멘!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즉 즐거움을 얻기 위해, 영광을 얻기 위해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는데 우리가 전도를 하다가 수치와 모욕을 좀 당하면 어떻습니까? 도리어 그런 수치를 당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내가 조금이나마 동참함으로 예수님께 미안함을 덜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당한 것과 같은 수치는 전혀 당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영광만 얻으려고 합니다. 아- 그건 안 됩니다. 그건 바른 크리스천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을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고, 하늘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마5:11-12) 반면 칭찬과 영광만 받으려고 하면 화가 있다고 말씀합니다.(눅6:26)

여기 캐나다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나라입니다. 고로 기독교가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여기서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수치스럽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면 여기서도 종종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전도인을 당황하게 만들고 모욕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하지 않았으면 내가 오늘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 내가 이 외국 땅에 와서 별 시답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다니! 아- 재수 없어! 물론 이런 경우 솔직히 기분이 안 좋을 겁니다. 그러나 이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위로합니다.

“괜찮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라. 예수님도 그런 수치와 모욕을 잘 참고 견디셨다. 너도 그런 수치와 모욕을 좀 견뎌봐라. 나중에 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수치와 힘든 일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나중에 우리들의 영광과 칭찬과 상급은 더 많게 됩니다. 특히 전도를 하면 수치와 고난에 더 많이 노출됩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하는 사람은 상급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단12:3)

결론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전도다가 수치를 좀 당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특히 외국 땅 여기 캐나다에서도 수치와 모욕을 당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의 상금과 영광을 더 많이 쌓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