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날짜: 
2008/08/16
설교: 

창9:8-17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이번에 제가 3박 4일간 혼자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한국 같으면 조용한 기도원도 많고, 가까운 삼각산이나 한적한 한강변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캐나다는 사람들이 있는 산과 들에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경찰이 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에는 출입금지가 되어있는 곳이 많고, 또 사람들이 살지 않으면 산에 올라가는 찻길도 제대로 없습니다.
고로 막상 3박 4일간 기도를 한다고 혼자 집을 나섰지만 특별히 어디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만만한 것이 로키 산이 있는 서쪽이기에 그냥 차타고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차안에서 “주여, 저는 어디로 갈까요?” 하고 하나님이 저를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기도한 장소가 바로 밴프 맞은편에 있는 호수였습니다. 무슨 호수죠? ‘미네완칸 호수’입니다. 그 호수를 찾아서 올라가다 보면 중간에 ‘존슨 호수’라는 아주 조그만 호수가 나옵니다. 그 호수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그 다리 바로 위에는 조그만 수력발전소 댐이 있고, 다리를 지나자마자 차를 댈 수 있는 언덕이 나옵니다. 그 언덕에서 보니 밴프 산들이 보이고 제법 경치가 좋습니다. 저는 그곳 언덕에다 차를 대고 이틀간 기도를 했습니다.
주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지나가는 차량도 적고 기도하기가 제법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존슨 호수에서 이도 닦을 수 있고, 간이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어서 편리했습니다. 그러나 밤 11시가 되면 공원 안에 차를 파킹할 수가 없도록 규제를 해놓았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밤에도 그곳에다 차를 대고 별을 바라보고 기도도 하고 싶었습니다만 할 수 없이 밴프 시내로 들어와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밴프 시내에서 잠을 자려니까 잘 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같이 있다면 어디 숙박 장소를 구해보겠지만, 혼자 기도하러 왔기에 잠시 잠만 자는 숙박 장소에다 돈을 쓰기도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밴프 온천장 파킹장에서 차를 세워놓고 차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순시원이 깨웁니다. 여기는 오버나이트 파킹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차를 몰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밴프 시내에 있는 공원 역시 오버나이트 파킹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시내 중심에 12시간 파킹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저와 같이 숙박 장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여기에다 차를 대고 잠을 자라고 특별히 밴프 시에서 배려한 장소인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저와 같이 차를 파킹하고 잠을 자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옆에는 가스주유소도 있고, 그 안에 있는 화장실 출입도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틀간 기도는 존슨 호수 길목 언덕에서 하고, 잠은 밴프 시내 오버나이트 파킹장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캘거리로 돌아오다가 고속도로 상에 있는 조그만 휴식처를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간이 화장실도 있고, 테이블도 몇 개가 놓여 있는데 도로 상에는 표지판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화장실 표지판도 없고, 입구도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출입이 아주 뜸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절벽도 있고 맞은편에 밴프 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2946 m의 런들 산도 보이고 제법 경치가 좋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차를 세워놓고 일박을 하면서 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마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저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믿고 기도한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인간이기에 보다 확실한 응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미네완칸 호수에 올라가서 보니 미네완칸 호수를 일주하는 보트가 있었습니다. CAA 멤버십이 있으면 디스카운트를 해준다기에 무심코 보트를 타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50명가량이 같이 보트를 타면서 그 보트 안에 있는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어를 듣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해서 보트 밖 난간에서 “주여-!” 하고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크루의 물살을 바라보면서 저의 눈에 비추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로 무지개였습니다. 배가 호수를 일주하는 동안 저는 저의 좌우에 보이는 무지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배 뒤쪽에도 파도가 치면서 무지개가 보이고, 저의 안경너머로도 무지개가 보여서 온통 전후좌우에 무지개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온 세계를 물로 심판하시고 난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져 왔습니까? 물론 역사를 보면 지역적으로 홍수가 난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파기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는 전세계적인 홍수였고, 하나님은 전세계적인 홍수를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신 약속이지 지역적인 홍수는 허락하신 것입니다.
혹 어떤 불신자들은 말하기를 노아의 홍수는 지역적인 홍수였다고 말하기도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전세계적인 홍수인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한 무지개를 보십시오. 그 무지개는 “다시는 전세계적인 홍수를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가 전세계적인 홍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었습니다. 무지개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세계적인 홍수를 겪고 살아난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은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이거 또 다시 홍수가 나서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들에게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무지개를 약속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수도 없이 걱정이 생기고, 더 나아가 두려움이 생깁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서의 불확실성은 우리들에게 걱정과 두려움을 더 세게 가져다줍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바쁘게 살다 보니 가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자연 세계에다 무지개를 두므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무지개를 보셨습니까? 그 무지개를 보면서 그냥 “빨주노초파남보! 야- 보기 좋다! 아름답다!”라고만 하지 말고 그 무지개를 만드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합니다. 즉 옛 약속과 새로운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확실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이 땅에서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할 때에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는 하나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약속도 하셨고 큰 약속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큰 약속, 작은 약속, 개인적인 약속을 모두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약속을 하고 때때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그 약속을 지킬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아브라함이 75세에 고향을 등지고 미지의 세계로 이민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롱하고 가슴 벅찬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노년에 절대로 낮선 땅으로 이민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희망이었습니다. 그 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큰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이민을 갔지만 그는 거기서 기근을 만났습니다. 아내를 빼앗기는 수치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도 전쟁 포로가 되는 환난도 당했습니다. 본처와 후처의 불화로 말미암은 가정문제도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자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아들은 24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어도 그 약속이 전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이 한 약속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어서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것일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들은 것일까요?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일까요? 자그마치 2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고, 아브라함도 나이가 99세가 되었는데 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쯤 되면 보통 사람 같으면 “에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나 이제 하나님 안 믿는다.”고 말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롬4:17-21, 히6:15)
또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11:11) 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참고 인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임이니라.”(약1:12)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닙니다.(벧후3:9) 때가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믿음이 약하여지거나, 뒤로 물러가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아브라함처럼 약속하신 그것을 굳건히 믿고 오래 참아 약속을 받으십시오.
성경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갈3:29)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약속으로 받은 사람들임.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바라보십시오. 그의 약속하신 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시오.(벧후3:13) 때가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