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마음

날짜: 
2004/12/26
설교: 

빌4:5 여유로운 마음
지난 토요일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블록 버스터에서 빌린 비디오를 반납하면서 파킹한 차를 빼고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찝차가 쌩- 달리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저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보이며 눈을 부라리며 인상을 팍-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까 혈기 많고 버릇없는 젊은이도 아닌 중년의 여인인데 어찌 그리 힘차게 가운데 손가락을 쭉- 뻗어서 보이는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어이없게 한방 먹으면서 제 입 속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와- 대단하다! 한국 사람 뺨치는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은 운전 중에 조그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도 상대방에게 심한 욕을 퍼붓고, 멱살을 잡고, 대로에서 싸우고, 난리를 부립니다. 그러나 여기 캐나다는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좀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교통 사고가 나도 대로에서 싸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사건을 겪으면서 "야, 여기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주차하고 있는 내차 옆에 트럭이 있어서 나도 시야가 가렸고 상대방도 시야가 가린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상대방이 주차장에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여자 양반이 좀 괘씸스럽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슬슬 화가 나려고 했습니다.
이때 제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야, 이런 조그만 일로 인해 좋은 기분이 순식간에 망칠 수도 있겠구나! 아이고, 그러면 안되지! 그렇게 되면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평안 나의 행복이 빼앗기고 말지! 허허 웃자 웃어!" 그렇게 웃으면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가 저 여자 양반처럼 같이 화가 뻗치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속으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야, 내가 오늘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한 시간 정도 기도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화가 나고, 입에서 나쁜 소리도 나오고, 기분이 영 잡칠 수도 있었겠구나!"
여러분, 운전 중에 보면 차간 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차와 내 차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야 충돌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차가 빨리 다니는 고속도로에서는 차간 거리가 더 많아야 하고, 비가 오는 날이나, 눈길에도 차간 거리를 더 여유 있게 가지는 것은 운전하는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루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혹은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좀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용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조그만 스트레스나 사건에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고, 열을 받는다면 어느덧 행복과 기쁨은 달아나고 말지 않겠습니까?
물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타이트한 직장 생활을 하는 셀러리맨들은 여유로운 마음은커녕 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고로 좀더 여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이곳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캐나다로 이민을 오니까 어떻습니까? 마음이 좀 여유로워집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여유가 없거나 불안하고 초조해지지는 않습니까? 돈이 조금 밖에 없다고 불안해지고, 직장과 사업장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초급하고, 영어도 잘 안되어 낙심이 되고, 이런 저런 불안정한 외국 생활의 일로 인해 근심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외국 땅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질 때 당신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합니까? 혹 따스하고 향기로운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묵상에 잠겨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혹은 클래식이나 세미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감상을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성경이나 좋은 책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혹은 시간을 내어 밴프라도 한번 다녀오거나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때로는 캘거리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세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의 경우에도 때로는 밤중에 코우치 힐 언덕에 올라가 캘거리의 야경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묵상에 잠기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좀더 여유로운 마음이 생기고 평안이 다가오게 됩니다. 물론 때로는 시간을 내어 어디론가 멀리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오면 좀더 여유로운 마음이 생길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유로운 마음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잔잔한 기쁨을 주고, 더 나아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내가 거하는 그곳,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여유로운 마음을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사는 너와 나의 인생이 좀더 행복하고, 좀더 포근하고, 좀더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발명가 에디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의 정원을 아름답게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정원에 가본 에디슨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정원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밤사이에 꽃 도둑이 들어와 꽃을 따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손으로 닥치는 대로 꽃을 따서 줄기가 상한 것도 있었고, 심지어 뿌리가 상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집안으로 들어가 종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꽃 도둑님, 앞으로 꽃을 꺾으실 때는 부디 가위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그 메모지를 가위와 함께 정원이 잘 보이는 곳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이러한 회신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 주인님, 매달아 놓으신 가위는 잘 들지 않습니다. 부디 숫돌에 잘 갈아서 놓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여유로운 유머입니까? 그러나 만약 에디슨이 속이 상했다고 마음의 여유로움을 갖지 못하고 종이에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림을 그렸다든지, 혹은 그 도둑에 대하여 심한 욕을 적어놓았다면 아마 다음 번에는 그 에디슨의 꽃밭은 도둑에 의해 무참히 망가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유롭게 글을 적어놓자 도둑의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다음부터는 그의 밭에 도둑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왜 화나고 짜증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어찌 모든 것이 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술술 형통하게 풀어지기만 하겠습니까? 캐나다가 아무리 살기 좋은 동네라고 해도 여기가 천국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이곳에서도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때 안 믿는 사람 같으면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셔버리자!" 하고 술독에 빠졌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두고 보자!" 하고 복수의 칼날을 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세상적으로 술을 먹거나, 상대방에 대하여 안좋은 언어를 쓰거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오히려 더 자신이 초라해지고, 더 자신이 불행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꽁하는 좁은 마음으로 계속 답답하고 불행하게 살아야만 할까요?
이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즉 좀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에디슨이 도둑에게조차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편지를 쓴 것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여유로운 마음을 성경의 곳곳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중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며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무리들에게 잡히실 때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들어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허리를 숙여 그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야, 네 검을 집에 꽂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여유로운 태도와 말씀입니까? 이제 예수님이 잡히면 모진 고문과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마당인데도 예수님은 여유로운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베드로의 칼에 잘려진 것을 보고 그 아픔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 모진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른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죽는 순간까지 한 생명을 천국에 데리고 가려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죽음을 앞두고 처음부터 이런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마26:38)
그리고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주여, 감당할 힘을 주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붙잡힐 때에도 예수님은 여유가 있으셨습니다. 빌라도의 사형 언도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여유가 있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그 모친 마리아를 염려하며 요한이라는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때로는 환경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의 여유로운 마음을 빼앗아 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여유로운 마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유로운 마음입니다. 마음이
여유로워야 진정한 용서도 이루어지고, 온전한 사랑도 나타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이루어지지 않고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어찌 남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는데 어찌 진정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떠하신 가요? 이런저런 사람도 용납하는 여유를 가지셨습니까? 이런저런 일로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평화로운지요? 겉모습에서만 나타나는 거짓된 여유와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에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으신지요? 혹시 그런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여유가 생기셨습니까?
혹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목사님, 지금 제가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 정도 있으면 이 외국 땅에서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목사님, 이래봬도 나는 실력이 있습니다. 나는 영어도 잘하고,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혼자 잘 살 수 있고, 내 마음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는 그대여- 그 여유와 용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지 않았다면 그 여유는 어느 순간 당신을 떠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난 여유와 용기와 평안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심판의 문턱에서 도저히 여유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난 여유만이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여유로운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여유로운 마음, 관용의 마음으로 우리의 교회, 우리의 가정, 우리가 사는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도 예수님처럼 끝까지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기를 원합니다.